오늘 매경 1면에는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피케티 내한 토론회를 연다는 사고가 실렸다.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4&no=1166292
이 기사를 보고 문득 짚이는 게 있어서 해당 출판사에 연락해봤다. 한 달 전 <21세기자본>의 국내판을 내는 출판사가 내가 블로그에 쓴 글을 짧은 추천사(사실은 서평 소감에 가까운)로 쓰겠다고 했다. 허락하는 조건으로 "최종 추천사 문장에 대해 컨펌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나도 이런 저런 일로 바빠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매경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정이 있어서 내 추천사를 싣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 동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동안 수십 편의 추천사를 부탁받아 썼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있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출판사의 이런 무례는 차치하고라도 이 책의 국내판 출간을 계기로 한 논쟁의 본질이 왜곡될까 심히 걱정된다. 일단, 오늘 찾아보니 번역자부터가 매경 논설위원이다.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과 언론에서 소홀히했던 불평등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게 한 책의 번역을 매경 논설위원이 맡고 국내 토론을 매경이 주최하다니! 매경은 국내에서 불평등 문제를 가장 심화시키는 일련의 정책 기조들을 지지해온 기득권 경제지의 대표격이다.
심지어 매경은 6월초 "한국판 피케티 보고서"라는 기획시리즈에서 <`富의 집중` 가속화…한국, 성장률 높여야 분배 개선된다>는 제목으로 피케티의 문제의식을 정반대로 왜곡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847520
이런 신문의 논설위원이 번역하고, 이 신문이 피케티를 국내로 불러 토론을 주도하다니 정말 어이없다. 오랫동안 이 중요한 책이 국내에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피케티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논지를 피케티 책의 내용을 빌어 주장한 매경의 기획기사들은 거의 "지적 테러"이자 피케티 책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이 같은 매경의 보도 태도도 문제지만, 한국판 출간에 맞춰 방한하는 저자가 이런 보도를 한 매경 행사부터 참석하게 하고, 이 토론에서부터 한국사회의 논쟁을 시작하게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는 지난해 조셉스티글리츠 교수가 쓴 <불평등의 대가>의 한국판 해제를 썼다. 외환위기 이후 극심해진 국내 불평등 문제를 다시 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책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이 책이 불평등 문제에 대한 논쟁과 정책 전환을 촉발할 수 있기를 바랐던 사람들에게 이 무슨 찬물을 끼얹는 행태란 말인가.
이 글을 쓴 뒤 해당 출판사는 아래와 같이 이번 책의 번역 과정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 저 또한 <21세기 자본> 한국판의 최종 번역본은 잘 바로잡아졌기를 기대하지만,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의 번역과정의 문제점은 해당 출판사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출판사의 글에 대한 생각을 다시 아래에 소개합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34204819928123&id=229732697042010
해당 출판사의 글을 잘 읽어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제 지적에 당황한 출판사의 변명처럼 보이네요.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번역을 정확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장경덕 논설위원을 골랐다? 저도 번역을 해봤습니다만, 대중적인 책과 <21세기 자본>의 번역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21세기 자본>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직접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경덕 논설위원은 그냥 대중서에 가까운 책들을 깔끔하게 번역하는 사람 정도 아닌가요? 그것도 초벌번역을 전문번역가 두 사람과 같이 했다고요? 한국에서 이런 분야 전문번역가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냥 번역으로 돈 버는 사람을 출판사가 "전문번역가"라고 지칭했다면 그건 독자들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한 말장난에 가깝습니다. 물론 감수를 하신 이강국 교수님이나 해제를 쓰시는 이정우교수님 같은 분이 의견을 주는 등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책은 기본적으로 번역자 자체가 이 분야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장경덕 논설위원이 대중적인 책의 번역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책의 번역 적임자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군요. 실제로 아는 지인을 통해 이 책의 초벌 번역에서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전해들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 도움으로 그럭저럭 번역이 바로잡혔고 최종적으로는 좋은 결과물이 나왔기를 기대합니다만, 그건 거꾸로 장경덕 논설위원이 결코 번역의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고서도 아직도 장경덕 논설위원이 번역의 적임자였다고 착각하는 건지, 우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출판사 관계자분들 태도, 정말 문제군요.
개인적으로 장경덕 논설위원을 폄하할 생각도, 그 분과 척질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책의 적임자는 아닌 것 같다는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고, 출판사 관계자분들의 나이브한 생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싪을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피케티 책의 번역자로서 매경 논설위원인 분의 위치 등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나이브해 보입니다. 매경 논설위원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닙니다.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그 신문의 논조에 상당 부분 기여하는 사람입니다. 장경덕 논설위원 개인적으로 어떤 입장을 피력했던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가 상당한 지위를 가진 매경의 간부이기에 그가 몸담은 매체가 어떤 입장을 가져왔는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장경덕 위원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에게는 매경 논설위원이라는 타이틀이 훨씬 더 크게 와닿을 것이니까요. 제가 피케티였고, 매경이 자신의 책과 관련해 엉뚱하게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더욱 성장해야 한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는 걸 알았다면 아마 매경 지식포럼에 오지도 않았을 것 같군요.
이렇게 중요한 책은 번역을 잘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 책의 취지와 의미가 훼손되지 않도록 한국 사회에 소개되는 모든 과정에도 상당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출판사가 이런 분야 식견이 특별히 깊지 않은 매경 논설위원을 번역자로 삼고, 피케티의 취지와 정면으로 반하는 보도를 잇따라 한 매경의 행사에 저자가 한국판 출간에 맞춰 오는데도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식의 변명이 온당한 건가요? 저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출판계 사정 모르지 않는데, 정말 이번 매경 행사에 출판사가 아무런 관련이 없나요? 그런 말을 출판계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이라면 믿겠습니까? 제가 어제도 전화주신 관계자 분께 말씀드렸지만, 지금이라도 제 지적을 약으로 삼아 <21세기 자본>이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하는데 더욱 신경 쓰기 바랍니다. 저도 그런 방향으로는 최대한 도울 생각이고, 이 책이 정말 한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낳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