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1990년대에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내야 했고 아직까지도 불황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준다. 일본 부동산 거품의 붕괴와 이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는 우리나라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 원인으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지목된다.
-세계화에 따른 경제 구조의 변화
-인구 감소와 저출산 고령화, 1인 가구 급증
-거품 경제 시기에 대량으로 과잉 공급된 물량
-초저금리에 따른 거품으로 지나치게 높아진 주택과 토지 가격
-정부의 무리한 부동산 부양책에 따른 거품 해소의 지연
우리나라의 사정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심지어는 거품 붕괴시기에 남발된 무리한 부양책으로 거품 해소가 지연되고 있는 것도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잃어버린 10년을 몰고 온 원인들 가운데 몇 가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 보도록 하자.
일본 거품 경제의 배경
일본의 거품 경제 배경은 1985년에 체결된 ‘플라자 합의’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함께 누적되는, 이른바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다른 선진국들에 압력을 넣어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대신 독일의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를 절상하는 합의를 체결하는데, 이것이 플라자 합의다. 당시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해 오던 일본은 1년 동안 달러 대비 가치가 두 배로 뛰어 오르면서 수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플라자 합의 이전, 막대한 무역 흑자를 바탕으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났던 일본은 저금리 기조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이 은행에 쌓여 갔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부는 금융완화법을 제정해서 기업들이 은행에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금리를 더욱 떨어뜨리고 통화량을 늘리는 경기 부양책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되자 시중에는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자금이 넘쳐났고, 저금리와 수출 상황 악화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들은 증권과 부동산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여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동구권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서 유럽이 막대한 경제 부담을 떠안으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본으로 자금이 흘러들어오면서 거품을 부채질했다.
한국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에 한국 경제가 추락하는 상황에서 들어선 김대중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서 저금리 정책과 대출완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세계적인 글로벌 호황이 찾아오면서 해외 자금이 유입되었다. 유동성은 풍부해졌지만 이러한 자금들은 기업의 설비투자보다는 증권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배경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 거품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따른 풍부한 유동성과 저금리 기조 속에서 투자처를 찾아서 많은 양의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면서 거품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일본은 주로 기업을 위주로 한 토지 시장이 거품을 주도한 데 비해 한국은 개인을 위주로 한 아파트 시장이 거품을 주도했다. 이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놓인 부동산에 대한 관점과 주거 문화 차이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 역시도 주택 거품이 끓어올라서 대량으로 주택이 공급되었고, 한국도 땅 투기 열풍이 불었다. 일본의 거품과 한국의 거품은 그 원인과 전개 과정에서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거품의 절정, 그리고 정부의 대응
거품 경제를 타고 일본의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르고, 정부의 정책은 난개발을 촉진시켰다. 낙후된 지방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1987년에 만들어진 리조트법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마다 대규모 리조트 개발 계획을 쏟아내면서 전국에 3천여 곳, 국토면적의 40%에 가까운 지역에 리조트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땅값 급등을 더욱 부채질해서 부동산 거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획들은 결국 무산되었고, 실제로 완공된 리조트들은 줄줄이 부도사태를 겪으면서 지역경제를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한국의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리조트와 골프장 개발에 나서고 각종 국제 이벤트를 유치했다가 큰 적자를 기록하면서 지역 경제에 짐이 되고 있는 실정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지나친 거품은 꺼지게 되어 있다. 어떤 상품이든 언제까지나 가격이 오를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서는 너무 비싸져서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을 정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격 조정 압력을 받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정부도 압박을 받게 된다. 자산 가치가 폭등하게 되면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거품 경제의 폐해를 걱정하는 여론도 점점 커진다. 결국 일본 정부는 90년대 들어서 거품을 잡기 위한 대책을 세우게 된다. 통화량을 억제하고 금리를 올리는 한편, 토지 거래에 매기는 세금을 올리고 부동산 관련 융자를 규제했다. 한편 세계화 과정 속에서 기업들의 해외 진출, 특히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기업들 역시도 토지 가격과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에 공장을 늘려 나갔다. 그만큼 국내의 토지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격 압박은 더욱 심해진 것이다. 갑자기 시장에 매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잃어버린 10년’의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거품 붕괴를 두고 한국의 기득권 언론에서는 ‘너무 늦게, 너무 강한(too late, too strong)’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거품을 잡기 위한 대책을 너무 늦게 내놓았으며, 너무 강한 대책을 쓴 결과 거품을 갑작스럽게 꺼버려서 잃어버린 10년을 자초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오히려 거품이 걷잡을 수 없이 끌어 올라서 강력한 대책을 쓰지 않고서는 이를 잡을 방법이 없을 정도로 일본 정부가 궁지에 몰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인식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부동산 거품이 천정부지로 끓어올랐을 때, 참여정부에서는 기본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2006년에 ‘버블 세븐’을 지목하면서 “지금 빚내서 집 사면 패가망신한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으로 거품을 잡는 데에는 실패했다. 2003년까지 지속됐던 2000년대의 1차 부동산 폭등기가 일단락되자 부동산 기득권 세력들은 “경착륙은 안 된다”며 연착륙론으로 위장한 부양책을 주문했다. 그 결과 당시 이헌재 재경-강동석 건교 라인은 투기 과열지구 해제를 비롯해서 부동산 경기 부양책에 나섰다. 또한 건설업계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신도시 개발이 대대적으로 추진되면서 이른바 ‘판교 로또’로 상징되는 수도권 중심의 2차 부동산 폭등을 불러왔다. 참여정부의 정책 실패는 오히려 ‘강남불패’의 신화만 키웠고 시장에서는 정부가 절대로 집값을 못 잡을 것이라고 비웃어댔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거품이 절정으로 치닫고, 궁지에 몰린 참여정부는 후반기에 들어서 초강수를 내놓아 거품을 잡아야 했다.
이미 한국의 아파트 시장은 인구 증가 둔화와 고용 불안, 고령화의 진행으로 수요층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상태에서 투기 수요로 지탱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일부에서는 마치 참여정부가 너무 심한 부동산 과열 억제 대책을 내놓아 탓으로 거품이 붕괴되고 침체에 빠진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놓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일본과 한국 모두 거품이 과열되는 시기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거품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 초강수를 두어서 거품을 잡아야 했다. 토건세력과 기득권 언론은 초강수가 문제라고 떠들지만, 진짜 원인은 단순하다. 실제 가치에 어울리지 않게 거품의 힘으로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올랐다면 그만큼 떨어지는 폭도 크고, 떨어지는 속도로 빠를 수밖에 없다.
버블 붕괴, 그리고 정부의 부양책
부동산 시장이 버블 붕괴 단계로 반전되고 기업 도산과 개인 파산,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가 빠르게 악화되자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부양책을 내세우게 된다. 90년대 버블 붕괴 시기에 일본 정부는 부동산 버블 붕괴를 막기 위해 1992~1995년 동안 무려 66.9조 엔에 달하는 각종 경기부양 대책을 쏟아냈다. 경기부양 대책 외에 2조 엔씩 세 차례 보완 대책이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 재정투입은 73조 엔에 이른다. 이는 1994년 일본 정부의 일반예산 규모와 맞먹는 액수였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을 경기부양 대책에 투입했지만 결국에는 버블 붕괴를 막지 못했다.
왜 일본의 부양책은 효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 당시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은 토건업자들과 강력한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경기 부양책의 속을 들여다보면 지나친 거품을 빼고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기보다는 토건업계를 위한 각종 각종 건설 및 토건 사업들로 들어차 있다.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거품을 조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뚜렷한 계획도 없이 육지와 무인도를 연결하는 대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산을 마구 훼손해 건설했으나 산토끼와 노루만 다니는 도로, 조그만 시골길과 연결되는 거대한 고가도로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품을 거품으로 막는 퍼주기식 경기부양대책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블붕괴를 막지는 못했다.
이런 부양책은 이명박정권의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닮아 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다가 좌절되자 들고 나온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대규모 공공 토건사업을 일으켜서 건설업계에 막대한 돈을 퍼주었지만 결국은 강을 살린 게 아니라 오히려 망친 사업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반드시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토건업계를 먹여 살리기 위한 억지 사업으로 후대에 두고두고 짐을 떠넘겼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닮은 것이다.
일본의 건설 경기 부양책으로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부실 건설업체들의 상당수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버블 붕괴 초기에는 건설업체의 연쇄 도산이 일어났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상황을 보면 일본의 건설업체 수는 오히려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일본의 경제전문가인 사이토 세이치로에 따르면 건설 토목산업 종사자 수는 91년 604만 명에서 96년에는 676만 명으로 오히려 72만 명이 늘어났다. 반면 이 기간에 제조업 종사자 수는 1,563만 명에서 1,450만 명으로 113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또한 같은 기간의 건설 토목 관련 업체 수를 보면 60.2만 개에서 64.7만 개로 약 4.5만 개나 늘어났다.
부동산 거품이 일면 당연히 건설 붐도 일고 그에 따라서 회사가 늘고 규모도 커진다. 반대로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 건설 경기도 죽고, 부동산 붐 때 생겨났던 건설업체 수가 줄어드는 것이 정상이다. 경기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서 관련업계도 영향을 받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일본의 건설업체 수는 정부의 막대한 공공사업 확대에 힘입어 버블 붕괴기에 더 늘어났다. 그들은 당장은 살아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 예산이라는 인공호흡기로 목숨을 부지하는 좀비기업들이 대폭 늘어났다. 부실기업의 퇴출이 제대로 이뤄졌더라면 살 수 있었던 기업들조차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좀비기업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건설사의 부실은 계속 증가했고, 결국 금융권의 부실 증가로 이어져 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를 가져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역시도 비슷한 상황으로, 정부의 무리한 부양책 때문에 건설업계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좀비 건설업체’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국의 건설업체 수는 외환위기 이후에 불어 닥친 부동산 열풍을 타고 세 배나 늘어났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좀비 기업들은 특히 공공 입찰에서 덤핑을 남발하면서 건설업계 전반의 수익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가고 있다. 박근혜정부에 들어서도 주택 공급 과잉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들고 나온 것이 공공 물량 축소다. 서민들의 주거 안정에 도움이 되는 물량을 줄여서 민간 건설업자들을 살리자는 발상이다. 정말로 공급 과잉 문제를 풀려면 지금이라도 지나치게 비대하진 건설업체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시장 퇴출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건설업계를 살리는 쪽으로 매달리게 되면 이들 업체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집을 지어댈 수밖에 없고, 밀어내기식 분양으로 공급 과잉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편 일본 정부는 거품 붕괴 속도를 늦춘다는 명분으로 금리 인하 그리고 주가 부양에도 나섰다. 우정연금과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을 동원해서 주가를 떠받쳤다. 일본의 이 같은 주가부양 대책을 국제금융계에서는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의 머리글자인 PKO(Peace-Keeping Operation)에 빗대 PKO(Price-Keeping Operation)라고 조롱하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정부를 주식시장의 건전한 투자환경 조성자로 보는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특정한 목표주가를 정하고 정부가 투자를 결정하는 일본 정부를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한편 정부는 우리나라의 한국은행 격인 일본은행에 압력을 가해서 90년 상반기에는 6% 수준이었던 기준금리를 1994년까지 1.75% 선으로 대폭 낮췄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시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금리가 내려가면 대출을 받아서 부동산을 사들이는 수요가 늘어났지만 거품 붕괴 시대에 은행들은 이미 부동산 및 건설업계의 대규모 부실채권을 잔뜩 떠안고 있는 상태에다 신용경색까지 겹쳐 추가 대출을 할 여력이 없었다. 시장에서도 부동산 거품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뚜렷하게 인식하게 됐기 때문에 기준 금리가 내려도 효과가 없었든 것이다.
일본의 거품 붕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잘못된 부양책을 남발한 결과,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국가채무 부담 때문에 90년대 후반에는 대규모 경기부양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양책으로 연명하던 건설업계는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이 위기는 부실채권 급증과 금융기관의 위기로 번졌다. 거품 붕괴 국면에서 부실해진 건설업계가 제대로 구조조정이 되지 못하면서 90년대 후반에는 결국 도산기업 수와 도산기업의 부채 총액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이명박정부의 경제 정책과 크게 닮아 있다. 이명박정부도 경제위기로 주식시장이 반토막이 나자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을 동원해서 주가 떠받치기에 나섰고, 한국은행에 갖가지 압력을 가해서 저금리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일본의 기준금리가 6%에서 1.75%까지 떨어지는 데에는 4년이 걸린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 2008년 8월 5.25%이던 기준금리를 단 몇 달 만에 2%까지 내렸다. 그러나 온갖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부동산 시장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토건사업과 부동산 부양을 위해 국공채를 200조 이상 남발한 정부의 재정이 부실의 늪으로 빠졌다. 정부는 이를 숨기기 위해서 4대강 사업을 비롯한 대형 토목사업의 부채를 수자원공사와 같은 공기업에 떠넘겼다. 이에 따라서 정부 재정은 괜찮은 것처럼 보였지만 공기업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종의 ‘분식회계’인 셈이다.
앞서 소개한 일본의 경제전문가인 사이토 세이치로에 따르면, 90년대에 일본 정부가 펼친 대대적 건설경기부양 대책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뿐 진정한 원인치료를 미루게 함으로써 도태돼야 할 기업까지 목숨을 연명해 일본 경제의 증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초저금리 정책과 재정지출 확대로 격렬한 통증을 숨긴 결과 일본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 진단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한국은 과연 일본과 같은 장기 침체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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