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소동 끝에 정부의 종부세 완화안에 대해 여당인 한나라당이 원안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일부 의원들이 청와대안에 반기를 드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다가, 결국 ‘당론에 따르겠다’고 정리한 것이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속이 너무 빤히 보인다. 한 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생쑈’를 벌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환율 급등과 경상수지적자, 금융권의 신용 경색, 내수 침체로 온 나라가 난리판인데 이게 무슨 엉뚱한 짓인가? 자신들과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층들 민원 들어주는 것이 그리 급했나? 국정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만 있어도 이런 추악한 행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경제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기에 비교적 시급한 현안이라 할  수 없는 종부세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했다는 발언을 듣는 순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박대표가 "종부세는 좌파 정권의 대표적 악법이고 일반 세제와도 전혀 맞지 않는 법률이기 때문에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는 게 없으니 무조건 좌파, 빨갱이 등 이념공세뿐이다. 여당 대표의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니 국가 경제가 불안하지 않을 수 있나?

 

종부세는 보유 자산에 대해 매기는 세금으로 보유세의 일종이다. 이러한 종부세는 시장의 실패를 초래하는 투기를 막는 제동장치 역할을 한다. 주택가격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 단기간에 급등할 때 보유세를 시장가격에 연동하도록 해놓으면 부동산 가격이 뛸수록 세금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시세차익만 갖고 좋아할 수 없게 되니 부동산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급이 늘어나 부동산 가격 안정에 도움이 된다. 또 같은 동네에서 누군가 투기를 통해 집값을 과다하게 올리려 하면 다른 주민들은 보유세 부담이 늘어나게 되므로 투기적 집값 상승에 반대하게 된다. 따라서 종부세는 잘 디자인되면 부동산 투기에 대해 강한 내성을 가지게 된다. 시장 주체들이 스스로 투기를 방지하고 가격을 안정화하게 하는 가격 안정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박 대표의 주장처럼 좌파 정권이 사회주의 평등사상에 젖어 자산가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만들어낸 악법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 보유 부담을 늘려 가격을 안정시키고, 부동산을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소유케 하는 매우 시장 친화적인 세금이다.

미국의 보유세율도 주별로 큰 편차가 있지만 평균 1.15%가 넘는다. 보유세율이 이보다 더 높은 선진국도 많다. 그런데 우리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필자가 직접 계산해본 바로는 아직 0.3%도 안 된다. 정말 갑작스러운 종부세 시행으로 문제점이 있다면, 앞으로 ‘미세 조정’을 해나가면 된다. 그런데 선진적인 세제 구조를 만들어가지는 못할망정 갓 시행된 법률을 무력화시킨단 말인가? 그것도 시대착오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의 종부세 관련 발언도 자신들의 수준을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며칠 전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종부세 완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세금체제를 바로 잡자는 취지"라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잘못된 세금체제는 부동산 부자들에게 과세하면 안 된다는 뜻이란 말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잘못된 세금체제를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한국의 재정상태는 결코 건전한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외환위기 전 50조원이던 국가채무는 2007년 기준으로 300조 원에 육박했다. 또 국가채무 증가 속도도 해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연기금 등으로부터 차입한 사회보장기여금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반면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연금 지급을 위한 재정지출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정부는 2013~2015년경부터 베이비붐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는 시기에 대비해 매우 신중한 재정 운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재정구조의 건전성을 미리 확보하지 못한다면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질 생산인구 감소 등에 따른 향후 세입세출 구조 변화에 대한 치밀한 준비 없이 마련한 막무가내식의 감세안을 내놓았다. 이번 종부세 완화안은 그러한 감세안의 최종 마무리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향후 부족해질 수 있는 세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방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세원 투명화 및 세원 기반 확대 등에 따른 일시적인 세수 초과 등에 기대 ‘문제 없다’고 하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효과가 아니다. 일정한 단계에 접어들면 세원 투명화 및 세원 기반 확대는 한계에 이르게 된다. 또한 감세에 따른 경기 활성화로 세수 감소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다양한 실증 연구에 비춰볼 때 정부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반면 감세에 따른 세수 감소 효과는 향후 세율 조정이 없다면 계속 지속되게 된다. 한 번 내린 세율을 도로 올린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더구나 한국 경제는 부동산 버블 붕괴 등 향후 수년 내에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지출 수요가 크게 늘게 될 것이다. 감세안 추진에 따라 세수는 줄고, 재정지출 수요는 크게 는다면 국가 재정의 건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된다. 여기에다 은퇴 세대 증가로 인한 사회보장기여금 지출 수요 및 실질 생산인구 감소로 인한 경기 위축 효과까지 감안할 때 빠른 속도로 재정이 악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정부의 감세안에는 불과 몇 년 안에 벌어질 상황에 대한 대비책조차 전혀 없다.

 

또한 급격히 변화한 한국 경제의 구조에 걸맞은 세입세출 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도 전혀 없다. 한국은 1970년대 기본 조세체계를 구축한 뒤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땜질식 세목 변경으로 일관해왔다. 이 때문에 새로운 경제구조에 걸맞은 조세체계의 정비는 시급히 추진해야 할 필수 과제다. 재정부도 겉으로는 ‘선진조세체계’를 구축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겉으로 내세운 정책 목표에 전혀 부합하는 것 같지 않다. 현재 조세체계는 개발경제 시절 노동 및 자본집약적 성장 시대에 구축된 것으로 2000년대 이후 자산 경제 비중이 급격히 커진 상황에 맞는 조세체계라고 할 수 없다. 과거 생산경제 활동의 비중이 클 때에는 법인세나 소득세 등 가계나 기업의 생산 활동에 대한 세금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산경제 비중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 같은 체계를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법인세나 소득세를 깎을 수도 없다. 앞서 말한대로 지속적인 세원을 추가적으로 확보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재정 위기에 노출될 수 있고, 이는 극단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침체와 사회보장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경제상황에 걸맞은 새로운 세원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부동산 등 자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 등의 보유세는 선진국 수준으로 계속 높여갈 수밖에 없다. 또한 양도세의 경우에도 보유세제가 정착되기 전까지는 집값 상승으로 인한 우발이익을 환수한다는 측면에서 큰 틀은 좀 더 유지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앞으로 자산임대소득이 크게 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과세를 강화해 생산경제의 세수 감소를 보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도, 근로소득에 대해 수백만, 수천만원의 세금을 부과하면서 불로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나 임대 소득에 대해 훨씬 적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세제로는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꺾어 현 정부가 말하는 경기 활성화도 어렵게 된다. 따라서 정말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선진조세체계를 구축하려 한다면, 이 같은 세원 구조에 대한 조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방향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오히려 종부세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감세안을 통해 양도세와 상속세 부담을 급격히 완화함으로써 투자자 또는 투기자들의 불로소득을 용인해주고 있다. 이는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근로의욕을 더욱 감퇴시킬 뿐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종부세 등 보유세 강화도 이 같은 전체적인 조세체계의 개혁을 전제로 해서 추진했어야 한다. 물론 일부 기득권 언론의 왜곡과 선동도 있었지만, 부동산 투기 대책의 성격만 부각되다보니 정책 추진 초기부터 논란을 부르고 불필요한 반발을 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조세정책도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으로 추진됐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국의 경우 국세에서 차지하는 간접세 비중이 높아 직접세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국세청이 발간하는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한국의 직접세 대 간접세 비율은 46.8 대 53.2로 간접세 비중이 더 높다. 그나마도 2000년 40%선이던 직접세 비율을 많이 끌어올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62.4 대 37.6), 미국 (92.7대 7.3. *미국의 경우 판매세 등이 모두 주세로 잡히므로 연방정부의 국세 비율로만 보는 데는 한계가 있으나, 감세정책의 효과를 보는 측면에서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영국(59.1 대 48.9) 등 상당수 선진국들은 직접세 비중이 더 높다.

 

조세체계에서 간접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으면 그만큼 세금의 역진성이 강화된다. 이건희 회장이든 노숙자든 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는 비율이 그만큼 높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휘발유에 붙는 세금은 소비자들이 기름을 넣을 때마다 소득에 상관없이 똑같이 간접세 형태로 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지금까지 추진한 종부세, 양도소득세, 종부세, 상속세, 소득세 등이 모두 직접세다. 간접세를 그대로 둔 채 직접세만 집중적으로 깎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직접세 비중이 주는 만큼 간접세의 세수 비중이 더 높아질 것이다.

 

실제로 기획재정부가 25일 발표한 '2009년 국세 세입예산 및 중기 국세 수입전망'에 따르면 대표적인 간접세인 부가가치세의 내년 세입은 48조5000억원이다. 올해 전망치(44조3000억원)보다 4조2000억원, 9.5% 늘어난 수치다. 또 다른 간접세인 증권거래세는 27.6% 증가했다. 간접세 성격의 교육세와 관세의 증가율은 각각 8.5%, 8.1%로 총 국세 증가율 7.6%보다 높다.

 

반면 직접세는 근로소득세와 종합소득세, 양도소득세 등을 합한 소득세가 16.1%로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는 것 외에 다른 세목들은 소폭 증가에 그치고 있다. 특히 직접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법인세는 1.5% 늘어나는데 그친다. 내년 국세 증가율 7.6%와 비교하면 법인세는 사실상 줄어드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보유세인 종합부동산세는 31.4%나 감소한다.

이렇게 되면 세금의 역진성이 갈수록 높아져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세금을 통한 분배개선 효과가 5% 정도에 불과해 OECD국가 평균인 40%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런데 이를 개선하지는 못할망정 간접세 비중을 더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자신들의 후안무치한 행태가 드러날까봐 “지방세수를 추정하기 어려워 간접세와 직접세 비중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들도 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이렇듯 이번 종부세 완화안과 이미 9월 1일 발표된 감세안은 큰 틀에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세금체계와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대통령의 발언은 착각이어도 심각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종부세 완화안에 대해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잘못된 징벌적 과세로 1명의 피해자라도 있다면 다소 인기가 없더라도 원칙에 따라 바로잡는 것이 정부 여당의 역할”이라고 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강부자’ 1명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는 그렇게 열심인 서민들 피해를 구제하는 데는 그토록 관심이 없을까? 오히려 현 정부의 종부세 개편안은 수많은 근로소득자들의 사기를 꺾고, 분배의 역진성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대다수 국민을 괴롭히는 징벌적 과세다. 이 나라에서는 강부자만 국민이고, 서민은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부동산문제'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9. 29. 17:18
 


이명박 정부가 각종 건설경기 부양책과 부동산 세제 개편안을 무더기로 발표하고 있다. 출범 이후 첫 번째 부동산 대책인 소위 ‘8·21대책’부터, 9·1 감세안, 9·19 500만 호 주택공급안, 9·22 종합부동산세제(이하 종부세) 개편안 등이 잇따랐다.


발표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자면 △분양가 상한제 무력화 및 사실상의 후분양제 폐지 △최저가낙찰제 확대 적용 연기 △지방 미분양 아파트 환매조건부 매입 △ 수도권 전매 완화 △ 정부 예산 120조 원을 동원한 주택 공급 △뉴타운 및 신도시 추가 지정 △재건축 사업 촉진 △1가구 1주택 양도세 부담 및 상속세 부담 완화 △부유층 중심의 소득세 완화 △종부세의 유명무실화 등이다.


이들 대책의 공통점은 미분양 물량 증가로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건설업체들에게 유동성을 공급하고, 고가 주택 보유자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설 및 부동산 경기 부양’과 ‘집값 거품 떠받치기’로 일관한 정책들이다. 이밖에 정부가 향후 5년 간 56조 원을 투입하는 ‘광역경제권 선도 프로젝트’ 사업 또한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및 산업단지 조성 등 각종 개발사업이다. 정부가 새만금개발사업 추진에 속도를 붙이고, 제2 롯데월드 건설을 신속히 허가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모든 정책은 건설업계와 부동산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이들 대책을 내놓는 속도와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부는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고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리지만, 속으로는 부동산 거품 붕괴에 대해 극심하게 걱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을 쓴다고 해서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을 수는 없다. 최근의 국내외 거시경제 구조를 보면 부동산 거품 붕괴는 어떤 형태로든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정부의 각종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시장은 거의 반응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들 대책은 부동산 거품이 좀더 지속되도록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거품을 없앨 수는 없다.


또 당장 발등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국가의 미래에 필요한 사회적 기반을 근본에서 허물고 있어 염려스럽다. 감세안이 그 대표적 사례다. 외환위기 전 50조원 수준이던 국가채무는 지난해 300조 원에 육박했다. 그런 가운데 2013년경부터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는 등 ‘저출산 고령화’ 충격이 본격화될 것이다. 복지재정 충당금 등 재정 수요는 급증하는데 반해 경제 활력 저하로 세수(稅收) 기반은 줄어든다. 더구나 과거 일본이나 현재 미국에서 보는 것처럼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면 막대한 재정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지금 정부는 세원 투명화로 일시적으로 늘어난 세수를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철저히 부유층을 위한 감세안을 단행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 ‘지지층을 위한 복지’를 실현하는데 골몰하는 형국이다.


근시안적인 건설 부양책은 오히려 향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당장 500만 호 주택 공급 계획안은 2010년대 이후 주택 공급 과잉으로 부동산시장을 장기 침체로 몰아갈 수 있다. 이미 미분량 물량이 공식적으로만 15만 호 이상이고, 뉴타운과 2기 신도시 등 수도권에서 이미 계획된 물량만으로도 2010년 이후 막대한 공급이 이뤄진다. 반면 저출산, 고령화 추세에 따라 주택수요인구는 2010년대 이후 급감하고 수도권 인구 유입도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추가 공급 대책을 내놓은 정부를 보자니 정말 어이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상황을 바람이 잔뜩 든 풍선에 비유하자면 최대한 서서히 바람을 빼가야 한다. 물론 현재 부동산 거품 크기나 가계 부채로 잔뜩 쌓아 올린 거품 구조로 볼 때 상당한 충격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하듯 풍선에 바람을 더 집어넣어 거품을 키워서는 안 된다. 풍선이 지금보다 더 부푼 상태에서 터진다면 그 충격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 거품은 한국경제라는 신체에 자라는 악성종양과 같은 것이다. 악성종양은 더 커지기 전에 수술을 통해 도려내야 한다. 계속 안고 가다가는 한국경제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일반 국민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경제는 부동산 거품이라는 악성종양이 자라면서 이미 엄청난 중증을 잃고 있다. 한국경제의 핵심적 문제들인 소비 위축, 내수 침체, 실업률 증가, 양극화 확대, 고물가 고비용 구조 등의 문제는 상당 부분 부동산 거품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우선 가계부채의 증대와 이에 따른 이자 부담 증가로 가계의 소비 여력이 급격히 위축됐다. 또한 소비재와 달리 가장 값비싼 생활 필수재인 주택가격은 상승하면 그만큼 무주택 서민들의 실질소득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발생한다. 또 주거비 부담이 상승하면 이를 충당하기 위한 임금 상승이 합리화돼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자산 양극화가 심해지고 이로 인한 사회적 위화감도 증대된다. 토지 비용의 상승으로 경제가 고비용 구조로 흐르게 돼, 중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정말 한국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이제라도 부동산 거품을 서서히 빼가야 한다. 한동안은 버블 붕괴의 고통으로 많은 경제 주체들이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부동산에 몰린 돈을 생산경제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만이 미래를 기약하는 방법이다. 만약 2000년 이후 자산경제에 몰렸던 수백 조원의 돈 가운데 절반만이라도 생산경제에 몰렸다면, 지금 이 나라는 일자리가 넘쳐나 주체를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당장 정부가 재정을 더 풀고 민간의 투기 심리를 자극해 부동산에 돈을 더 집어넣어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칠 공산이 크다.


첨단 기술경제 시대이고, 지식정보화 시대, 창조경제 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국가 전체의 자원이 이런 영역에 더 배분되도록 해야 한다. 첨단기술을 고안하고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부동산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한 나라의 자원은 유한하기에, 제한된 자원 안에서 최적의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자원배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직 양산과 저임금으로 사람은 천대하면서 부동산만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 경제가 사는가? 서울 집값이 미국 뉴욕보다 비싸진다고 한국이 일류국가가 되는가? 전국 곳곳에 아파트를 즐비하게 짓는다고 성장 잠재력이 높아지는가? 현 정부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길게 보면 경제를 죽이는 길이다. 사람에 투자하지 않고 콘크리트에 투자하는 경제는 희망이 없다.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부동산문제'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김광수소장님께서 쓰신 글이 아니며 연구소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9. 25. 11:26

9월 19일 국토해양부는 저렴한 주택 공급을 위해 그린벨트를 대규모로 해제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꼭 필요하다면 다소간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한이 있더라도 땅값과 건축비를 내려 분양하면 훨씬 싼 가격으로 집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그린벨트를 해제해 싼 가격으로 서민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말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33개 뉴타운을 무더기로 지정한 탓에 대규모 동시 철거가 이뤄져 서민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한 장본인이 아닙니까? 서민 주거에는 관심 없이 정치적 욕심 때문에 강북 집값 올리기에 여념 없었던 사람이 바로 이 대통령 자신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는 그린벨트를 풀어 서민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한다면 뻔뻔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내놓은 대부분의 주택 및 부동산 정책은 계속 높은 집값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정책들입니다. 국내외 거시경제 환경이 부동산 버블 붕괴 압력을 높이고 있어서 집값이 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정작 이대통령 본인은 전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심리적 갈등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뉴타운 지역의 극심한 전세난을 보면서도 한 번 사과나 반성을 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새로 뉴타운 지정권을 가진 서울시와 협의도 없이 뉴타운을 추가 지정한다니요? 한 마디로 말이야 서민 주거 안정을 내세우지만, 건설업계에 사업물량 퍼주기에 여념이 없는 꼴입니다.

사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의 실제 효과나 정책 조합(Policy mix)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개념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신이 느끼기에 점수 딸 수 있다고 느끼면 정반대의 정책 효과를 가져와도 내지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아무 정책이나 듣기에 솔깃하다면 막 질러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쪽에서는 뉴타운을 통해 서민들을 쫓아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린벨트를 해제해 서민주택을 만든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나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자라서 ‘한 손이 한 것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을 엉뚱하게 실천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린벨트 해제를 통해 저렴한 주택을 공급한다는 이대통령 발언과 국토부 발표의 허구성을 짚고자 합니다.

시계 태엽을 되돌려 2004년 7월로 가봅시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민임대주택건설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대규모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국민임대 주택 공급을 추진합니다. 당시 이슈가 됐던 판교신도시의 경우 공영개발을 통해 100%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주장했습니다. 김광수 소장님은 이 같은 방식의 주택사업이 재무적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며 이론적 모델까지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판교를 로또 투기판으로 만들어 투기세력에게 먹잇감만 제공했습니다.

정부 스스로 벌린 로또 투기판 때문에 판교발 집값 광풍이 일자, 정부는 전량 국민임대주택을 짓겠다며 해제한 고양 삼송과 남양주 별내 지역의 절반을 분양 물량으로 채우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당시 건교부가 내세운 명분은 ‘판교급 신도시’를 만들어 주택 수요를 흡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집값은 어땠습니까?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해당 지역까지 투기가 극성을 부려 오히려 집값을 치솟게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직접 추진했던 은평뉴타운 지역을 예로 들어봅시다. 은평뉴타운 사업지구는 대부분 그린벨트 풀어서 조성했습니다. 그런데 평당 토지 보상비가 판교신도시의 평균 3.5배가량 됐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서울과 수도권 경계 지역의 그린벨트라고 보상비가 크게 더 적게 들어갈까요? 더구나 황당하게도 아파트 짓는데, 턴키방식(여기에서 길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상위 재벌건설업체들에게 엄청난 폭리를 취하게 해주는 발주방식입니다)으로 발주를 해서 엄청난 고분양가 만들었습니다. 후임 오세훈 시장이 똥바가지 뒤집어썼지만, 2006년 은평뉴타운 고분양가 사태로 주변 집값 들썩이게 만들었죠. 은평뉴타운 인접 서대문구나 은평구의 아파트 가격이 평당 700만~800만원이던 시세가 1200만~1300만원으로 수직상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전 치밀한 도시계획 없이 그린벨트 풀어서 급하게 만들었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도로나 학교가 제대로 확보 안 돼 언론에서 욕 엄청 먹었죠? 오세훈 시장이 분양가심의위원회 가동해 분양가를 평균 12%정도 낮춘 덕에 분양은 다 됐는데, 지금 입주율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생활 인프라가 없어서 주민들 불만 대단하고요. 물론, 뉴타운 사업으로 추진됐다는 특수성을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겠지만, 그린벨트 풀어서 집값을 낮췄습니까? 그렇다고 도시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주택단지가 들어섰나요? 사람은 그 사람이 해온 과거 행적을 통해 판단하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사기꾼이 어느날 갑자기 ‘난 사람 안 속여’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겠습니까


by 선대인 2008. 9. 23. 09:34

9.19일 국토해양부는 저렴한 주택 공급을 위해 그린벨트를 대규모로 해제하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꼭 필요하다면 다소간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한이 있더라도 땅값과 건축비를 내려 분양하면 훨씬 싼 가격으로 집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그린벨트를 해제해 싼 가격으로 서민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말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33개 뉴타운을 무더기로 지정한 탓에 대규모 동시 철거가 이뤄져 서민들이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한 장본인이 아닙니까? 서민 주거에는 관심 없이 정치적 욕심 때문에 강북 집값 올리기에 여념 없었던 사람이 바로 이 대통령 자신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는 그린벨트를 풀어 서민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한다면 뻔뻔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내놓은 대부분의 주택 및 부동산 정책은 계속 높은 집값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정책들입니다. 국내외 거시경제 환경이 부동산 버블 붕괴 압력을 높이고 있어서 집값이 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정작 이대통령 본인은 전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심리적 갈등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뉴타운 지역의 극심한 전세난을 보면서도 한 번 사과나 반성을 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새로 뉴타운 지정권을 가진 서울시와 협의도 없이 뉴타운을 추가 지정한다니요? 한 마디로 말이야 서민 주거 안정을 내세우지만, 건설업계에 사업물량 퍼주기에 여념이 없는 꼴입니다.

사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의 실제 효과나 정책 조합(Policy mix)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개념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자신이 느끼기에 점수 딸 수 있다고 느끼면 정반대의 정책 효과를 가져와도 내지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아무 정책이나 듣기에 솔깃하다면 막 질러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쪽에서는 뉴타운을 통해 서민들을 쫓아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린벨트를 해제해 서민주택을 만든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나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자라서 ‘한 손이 한 것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을 엉뚱하게 실천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린벨트 해제를 통해 저렴한 주택을 공급한다는 이대통령 발언과 국토부 발표의 허구성을 짚고자 합니다.

시계 태엽을 되돌려 2004년 7월로 가봅시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민임대주택건설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대규모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국민임대 주택 공급을 추진합니다. 당시 이슈가 됐던 판교신도시의 경우 공영개발을 통해 100%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주장했습니다. 김광수 소장님은 이 같은 방식의 주택사업이 재무적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며 이론적 모델까지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판교를 로또 투기판으로 만들어 투기세력에게 먹잇감만 제공했습니다.

정부 스스로 벌린 로또 투기판 때문에 판교발 집값 광풍이 일자, 정부는 전량 국민임대주택을 짓겠다며 해제한 고양 삼송과 남양주 별내 지역의 절반을 분양 물량으로 채우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당시 건교부가 내세운 명분은 ‘판교급 신도시’를 만들어 주택 수요를 흡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집값은 어땠습니까? 집값이 잡히기는커녕 해당 지역까지 투기가 극성을 부려 오히려 집값을 치솟게 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직접 추진했던 은평뉴타운 지역을 예로 들어봅시다. 은평뉴타운 사업지구는 대부분 그린벨트 풀어서 조성했습니다. 그런데 평당 토지 보상비가 판교신도시의 평균 3.5배가량 됐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서울과 수도권 경계 지역의 그린벨트라고 보상비가 크게 더 적게 들어갈까요? 더구나 황당하게도 아파트 짓는데, 턴키방식(이미 시사경제 회원들에게는 설명드린 바 있지만, 상위 재벌건설업체들에게 엄청난 폭리를 취하게 해주는 발주방식입니다)으로 발주를 해서 엄청난 고분양가 만들었습니다. 후임 오세훈 시장이 똥바가지 뒤집어썼지만, 2006년 은평뉴타운 고분양가 사태로 주변 집값 들썩이게 만들었죠. 은평뉴타운 인접 서대문구나 은평구의 아파트 가격이 평당 700만~800만원이던 시세가 1200만~1300만원으로 수식상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전 치밀한 도시계획 없이 그린벨트 풀어서 급하게 만들었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도로나 학교가 제대로 확보 안 돼 언론에서 욕 엄청 먹었죠? 지금 입주 초기여서 그렇지 뉴타운 전체 세대가 다 입주하면 교통대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오세훈 시장이 분양가심의위원회 가동해 분양가를 평균 12%정도 낮춘 덕에 분양은 다 됐는데, 지금 입주율 30% 정도밖에 안 됩니다. 생활 인프라가 없어서 주민들 불만 대단하고요. 물론, 뉴타운 사업으로 추진됐다는 특수성을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겠지만, 그린벨트 풀어서 집값을 낮췄습니까? 그렇다고 도시기반시설이 잘 갖춰진 주택단지가 들어섰나요? 사람은 그 사람이 해온 과거 행적을 통해 판단하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사기꾼이 어느날 갑자기 ‘난 사람 안 속여’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겠습니까?

지금 한국 주택 문제의 핵심은 국토부 표현대로 ‘괜찮으면서도 저렴한 주택(decent and affordable housing-미국에서 공공 주택 문제와 관련해 관용구처럼 나오는 표현입니다)’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형성된 집값이 너무 높아서 웬만한 고소득자도 빚을 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공급자인 건설업체의 사기적 폭리 분양가와 수요자의 투기 행태가 빚어낸 거품 집값입니다. 정부는 이를 막기는커녕 허황된 ‘시장원리’ 운운하며 실제 건축비보다 약 2배나 높은 표준건축비를 승인해주는 등 거품 집값을 사실상 용인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로서는 결국 일반 국민들이 큰 부담 없이 집을 살 수 있도록 집값을 낮춰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냐고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서울시가 진행하고 있는 ‘장기전세’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장기전세는 주변 전세 시세의 60~80%선에서 공급합니다. 최장 20년까지 거주할 수 있습니다. 재산세와 취등록세 등 세금 부담도 없고 주거 안정성까지 갖추고 있는 매우 좋은 주거상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올 들어 미분양이 속출하는 데도 장기전세는 최고 80대 1의 경쟁률을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매매할 수 있는 분양주택도 아니니 판교분양 때와 같은 투기도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주택을 전체 수도권 주택 재고의 20%까지 채운다고 해보십시오. 기존 매매 수요의 상당수가 장기전세로 이동할 것입니다. 그러면 집값이 얼마나 안정되겠습니까? 이렇게 이미 여러 가지 장점이 입증되고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기 있는 장기전세가 이번 500만호 공급계획 중에 겨우 얼마를 차지하는지 아십니까? 전국에 걸쳐 겨우 10만호입니다. 대신 주택정책 목표에 오히려 역행하는 지분형 아파트니 정책 효과가 의심스러운 신혼부부용 아파트니, 노후용 아파트니, 보금자리 아파트니 이름만 사람들이 혹하게 지은 주택 유형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싶어서죠.

공공 분양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연구소(김광수경제연구소) 김광수소장님께서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 3권에서 이미 저렴한 장기임대주택에 대한 이론적 토대는 제공하셨습니다. 사실 소장님 이론을 빌어 제가 쓴 책에서 주장한 내용이 서울시의 ‘장기전세’ 제도로 현실화됐으니, 현실로도 일정하게 입증된 셈입니다. 사실, 관련 제도만 갖춰지면 현재 장기전세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도 있습니다. 공공 분양도 똑같이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공공이 저렴하게 주택을 짓는 과정은 똑같고 지은 주택을 장기 임대(전세)로 주느냐, 분양하느냐 하는 공급방식만 다를 뿐이니까요.

그래도 의심하는 분들을 위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큰 틀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주택 공급 과정에서는 엄청난 개발이익이 생겨나는데, 이 개발이익은 땅주인, 거주자, 개발 대행기관(토공, 주공, 각 지방도시개발공사 등), 시행사, 설계사, 시공사, 투기세력 등에 의해 배분되고 있습니다. 주택 공급 과정에서 생겨나는 막대한 개발이익이라는 갈비를 여러 세력들이 돌아가며 뜯어먹어, 결국 수혜자가 돼야 할 서민들은 앙상한 뼈다귀만 핥게 되는 꼴입니다. 그러면 이런 개발이익을 공공이 최대한 흡수해 그것을 저렴한 장기임대나 공공분양 아파트로 공급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흡수하느냐고요? 현재 분양가 가운데 택지비가 보통 30~50% 가량 차지하고, 직간접공사비가 40~50%정도로 두 가지가 거의 90%를 차지합니다. 우선, 택지비를 봅시다. 지금은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투기세력이 뛰어들어 땅값을 띄워 놓은 다음 감정평가를 통해 토지 보상을 하므로 개발이익이 땅주인과 거주자, 투기꾼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정부가 개발 계획을 사전에 세워두고 사전 매입 후 개발에 들어가는 식으로 하면 보상비를 얼마든지 아낄 수 있습니다. 물론 도심 지역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판교나 용인, 동탄 정도쯤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부지 확보까지만 정부가 하고 이후 주택 공급과정은 이를 통합해서 관리할 CM(Construction Management)회사나 컨소시엄을 경쟁입찰을 통해 선정해 사업을 맡깁니다. 따라서 택지 조성도 토공이나 주공이 하지 않고 CM회사가 가격 경쟁을 통해 선정한 민간 토목업체가 합니다. CM이 경쟁입찰을 붙여 시공사를 선정하면 실제 건축비도 절반 이하로 낮아질 것입니다. 공기도 현재 26~30개월 정도인데 20개월 정도로 단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지금의 분양가보다 절반 아래로 훨씬 빨리 공급할 수 있습니다. 부실시공에 대해서는 정부가 책임을 묻고 통제하면 방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공공주택을 비롯한 공공건설사업은 이른 전문 CM이나 PM(Project Manager)들을 통해 얼마든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홍준표의 토지임대부 주택 같은 사기적인 ‘반값아파트’가 아니라 진짜 ‘반값 아파트’ 얼마든지 실현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현재 상태에서는 안 됩니다. 지금 국내에서 책임감리와 비슷한 역할 정도만 하게 하는 CM제도를 CM이 건설공사 전반을 관리하되 공사 전반에 대해 책임지게 하는 ‘CM at full risk 제도’를 도입해야 하고요. 또 토지보상, 감정평가, 감리제도, 금융기관 공사보증 제도, 하도급 구조, 건설업역 제도 등 건설산업 제도 전반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집권세력의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모든 권력기관과 관련 정부부처를 동원해 ‘방송장악’에 기울이는 정도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런 사기적 분양가의 거품을 뺄 의지도 없지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자신들 멋대로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도시 기반시설 과부하에 대한 고려는 아랑곳없이 용적률을 올려 겨우 집값의 15% 정도를 낮추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는 사실상 거품 분양가는 그대로 용인하면서 이번 정책을 서민용으로 포장하기 위한 포장술에 불과합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제시하는 방법대로라면 지금 같은 방대한 구조의 토공, 주공 필요 없습니다. 토공, 주공은 정부의 기획에 따라 토지 매입하고 CM사 선정해서 정부 계약을 대행하고 계약 이행을 점검하면 됩니다. 또 향후 장기 임대주택이 늘어나면 임대주택 관리 업무 부문을 키우면 됩니다. 이처럼 공기업 개혁이라고 하면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은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 주체로서 공기업의 역할과 기능을 점검해 재조정하는 게 우선입니다. 거기에 맞게 조직을 Redesign하고 Restructuring, Reengineering해야 합니다. 그런데 토공과 주공 통폐합 논의에서 보듯 그런 것은 전혀 없고, 그저 무식하게 Downsizing 개념밖에 모르는 게 이 정부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공공사업 물량을 봤을 때 토공, 주공의 반발이 심해지면 통폐합도 나중에 없던 일로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설사 통폐합된다 한들 정부의 엉터리 정책 사업들을 계속 받쳐주는 도구일뿐이라면 그게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요?

위에서 봤듯이 공공정책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최적의 방법을 찾는다면 사실상 방대한 공기업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공공의 목표를 훨씬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가 공기업 개혁과 관련해 외치는 구호는 온통 통폐합 아니면 민영화밖에 없으니 정말 한심할 따름입니다. 선진국의 정부 개혁이 궁극적으로 경쟁 체제 도입을 통해 국민 전체의 후생 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현 정부는 공기업의 영역을 줄이거나, 공공독과점 구조를 민영 독과점 구조로 바꿔 민간재벌기업의 사업 기회를 키워주는 것을 공기업 개혁으로 여기고 있으니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공공과 민간의 역할에 대한 개념부터가 엉망인데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정말 서민의 주거안정을 걱정하는 도덕적이고 역량 있는 정부라면 그린벨트 해제 안하고도 얼마든지 집값 안정시키고, 서민 주거안정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고 개발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든 자기 임기중 생색낼 수 있는 거창한 계획 발표만 하면 된다는 게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그는 서울시장 때부터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실제로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 고위 간부는 “이 대통령은 정책 방향의 큰 틀은 없이 자기가 생색낼 수 있는 사업을 찾아내 추진하고 포장하는 데는 선수”라고 말하겠습니까?


by 선대인 2008. 9. 22. 09:00

 

오늘 국토해양부는 주택 공급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도심공급 활성화 및 보금자리 주택 건설방안(9.19대책)’을 발표했다.오늘 대책 발표와 관련,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다만, 뉴타운과 관련해서 서울시내 7~8곳에 뉴타운을 추가 지정한다는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상 오보다. 국토부가 15개를 추가 지정한다고 하니, 기자들이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서울시에서 지정하지 않겠느냐는 짐작에서 나온 ‘작문’이므로 믿지 말기를 바란다. 이는 서울시 주택국의 고위 간부에게서 직접 확인한 내용이니 믿어도 좋다. 참고로, 서울시는 올해말까지 주거환경개선 정책자문단을 운영한 뒤 자문단 결과를 토대로 뉴타운 추가 지정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 서울시 정책전문관으로 일했던 필자 판단으로는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서울시장의 뉴타운 추가 지정은 어려울 것이다. 설사 추가 지정을 한다고 해도 매우 극소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뉴타운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국토부는 발표문에서 지속적인 공급만이 주택 시장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공급 확대론’을 근거로 대책을 마련했음을 밝혔다. “수요 억제를 통한 ‘불안한 안정’보다는 도심 등 선호 지역에 대한 안정적 공급을 통해 ‘근본적 시장안정’을 이뤄낼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발표문은 또 “당정은 최근 주택시장이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이는 각종 부동산 관련 규제와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수요가 단기적으로 위축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국토부는 앞으로도 주택 수요 연간 50만호에 상응하는 공급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국토부의 주택부족론에 기인한 주택 공급 확대론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치에 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택보급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았던 90년대 초중반 7년여에 걸쳐 집값이 하락했던 상황이나, 주택 보급률이 110~120%에 이르는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집값 거품이 발생하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에 대한 수요는 집을 사고 싶다는 욕구(want)만 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땡전 한 푼 없는데 아무리 집을 사고 싶다고 집을 살 수 있나? 집을 사고 싶다는 욕구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있어야 유효수요가 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강남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강남에서 살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말 유효 수요가 충분하다면 집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2001년 이후 주택 담보 대출이 200조원 이상 늘었겠는가?

 

최근 및 향후 주택 공급 상황에 대하여

 

이미 시장에는 공급 과잉임을 나타내는 징후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현재 주택시장에서 공급이 과잉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징표는 미분양 물량 급증과 잇따르는 입주율 저조다. 2008년 6월 현재 미분양 주택 수는 전국적으로 약 15만호. 하지만 실제 미분양 물량은 25만여 가구에 이른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기에 묶인 돈만 최소 45조원이다. 악성(惡性)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2008년 6월 기준으로 3만5190가구를 기록했다. 5월 기준 2만1757가구보다 약 62%나 급증한 수치다. 더구나 올해 들어 수도권에서 분양한 물량의 25%가량이 모두 미분양되고 있다고 한다.

 

전에도 설명한 바 있는 공급의 시차 효과 때문에 분양 위주의 주택 공급은 발표 당시에는 오히려 투기 심리를 자극한다. 반면 이렇게 한꺼번에 지어댄 아파트의 입주가 한꺼번에 몰리면 집값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 물량 들이붓기 효과를 가장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가 서울 송파구 잠실 재건축 단지의 역전세난이다. 2008년 8~9월에 1만8000여 가구의 재건축 아파트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매매가와 전세가가 동반 하락했다. 특히 투자 목적으로 산 사람들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한때 수도권 부동산시장에서 각광을 받았던 경기도 용인에도 불 꺼진 아파트와 상가들이 수두룩하다. 투자 목적으로 집을 샀는데 들어가 살 수도 없고, 세입자조차 구할 수 없으니 오죽하겠는가? 수도권의 아파트 공급이 지금도 사실상 초과 상태라는 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현상이 있을까?

 

문제는 2008년 이후에도 수도권에서 지속적으로 막대한 물량 공급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정부가 2006년 하반기 투기가 다시 극성을 부리자 2기 신도시 개발 계획을 내놓은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2009년 판교신도시 2만7000세대를 필두로, 2010년 위례(송파)신도시(4만6000세대), 광교신도시(3만1000세대), 동탄2신도시(11만 3천세대) 등에서 입주물량이 쏟아진다. 그 외에 검단신도시 6만6000가구, 파주신도시 3만4000가구, 김포신도시 5만9000가구, 양주신도시 5만6000가구 등 모두 10개의 2기 신도시에서 모두 52만 5023가구가 공급된다. 2010년까지 예정된 물량만 해도 30만 가구에 육박한다. 여기에다 ‘8.21’대책으로 인천 검단과 오산 세교에서 4만9000가구가 추가로 공급된다.

 

서울은 어떤가? 우선 뉴타운을 보자. 뉴타운은 사업지 수로는 35개지만 한 사업지역 당 개발면적은 재개발사업지 평균 면적의 약 40~80배에 이른다. 2008년 7월까지 지정돼 있는 뉴타운 사업지의 총 면적은 27.22㎢로 서울시 행정구역의 4.5%, 시가화 면적의 7.6%에 해당한다. 부천시 전체 면적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고, 서울시가 73~2007년 사이 추진한 주택재개발 사업 전체 면적의 1.5배에 이른다. 여기에서 공급되는 물량은 30만호가 넘는다. 여기에 더해 준공업지역 내 아파트 공급도 시작된다. 서울시 전체 준공업지역 면적은 27.7㎢로 뉴타운 사업지 전체 면적과 맞먹는다. 뉴타운과 준공업지역 개발 두 사업만 합쳐도 서울시 전체 시가화 면적의 15%를 상회한다. 물론 준공업지역 전체가 주택단지로 개발되지는 않는다. 산업용 부지를 확보해야 하고 공공 및 공익시설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에 공장비율이 30% 이상인 곳에는 공동주택이 허용되지 않았고, 10~30% 곳은 제한적으로 허용됐던 점을 고려하면 ‘계획적 개발’의 조건 아래 공동주택 개발이 가능해졌다. 이들 준공업지역에서도 2010년대 이후로 상당한 물량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판에 중앙 정부가 주택 공급 물량을 대폭 더 늘인다고 생각해보라. 어떻게 되겠는가?

 

향후 주택 수요 측면에 대하여

 

주택 공급 물량이 늘더라도 충분한 수요가 있다면 괜찮다. 하지만 향후 이들 주택에 대한 충분한 수요층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보통 주택 구입이 왕성한 시기는 35~54세 정도로 잡는다. 보통 30세 전후에 결혼한 뒤 5년 정도 자금을 모은 뒤 35세 전후부터 첫 번째 집을 산다. 이후 40대에 들어 직장 등에서의 승진 등으로 소득이 증가하고 자녀들이 자라면 넓은 평수로 늘려간다. 이후 50대가 되면 가정 사정에 따라 한두 차례 실제 수요나 투자 차원에서, 또는 출가를 앞둔 자녀들 증여용으로 사게 된다. 이후 55세 이후가 되면 고정 수입이 줄고, 자녀들의 출가 등으로 다시 평수를 줄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인구구조론적 측면에서 8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집값 상승을 일정 부분 설명할 수도 있지만, 글이 길어지니 생략하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부동산 시장을 뒤흔들었던 베이비 붐 세대가 주택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면서 주택수요를 크게 위축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직장에서 은퇴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집을 사지 않거나 기존보다 작은 주택으로 옮겨가는 패턴을 밟는다. 노후 불안이 갈수록 심해지는 추세에서는 은퇴 세대의 주택 수요는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베이비 붐 세대의 선두 주자인 58년 개띠들이 2013년을 전후해 정년을 맞아 직장에서 은퇴하기 시작한다. 반면 베이비 붐 세대의 끝자락에 위치한 74년생이 35세가 되는 2009년 이후로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다. 출생자 수가 101만(71년)--->87만(80년)--->66만(90년)--->64만(2000년)--->44만(2005년)으로 급격히 줄기 때문이다. 85만명 전후가 태어났던 78년생이 35세가 되는 시기는 2013년 무렵. 이보다 7년 후인 2020년에 35세가 되는 85년생의 출생자는 66만명 수준으로 급감한다. 결국 2013년 이후부터는 주택 구입 세대가 양쪽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들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LG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년 시기는 52세 전후로 당겨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실제 베이비붐 세대 인구 감소 여파가 주택시장에 나타나는 것은 2010년경부터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더해 한국 사회의 고령화 속도는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보통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인 나라)에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인 나라)로 가는데 보통 80년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한국은 고령사회에 진입한 2001년 이후 불과 26년만에 초고령사회로 이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된 일본이 36년 걸렸던 것에 비해서도 10년이나 빠른 속도다.

 

더구나 78년 이후 출생한 지금의 20대들은 절대 숫자에서뿐만 아니라 주택 구매력 측면에서도 앞선 베이비 붐 세대들의 빈자리를 결코 채우지 못한다.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고용 없는 성장’시대에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세대다. 동시에 2000년 이후 발생한 부동산 거품에서 철저히 불이익을 받게 된 세대다. 이들의 대부분은 베이비 붐 세대에 비해 경제력이 취약하다. 이들이 기성 세대가 빠져나간 주택 시장을 채워줄 수 있을까?

 

이처럼 이번 9.19대책은 한 마디로 최근 및 향후 주택시장의 수급 상황을 완전히 오판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국토부가 이런 황당한 주택 공급 방안을 내놓은 이유는 뭘까? 필자가 볼 때 가장 강력한 근거는 이명박 대통령의 입이다. 한 마디로 이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와 통화했던 서울시 고위 간부도 “국토부에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연간 50만호 공급에 맞춰준 것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다.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대로 실행된다면 집값은 매우 안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거품을 더 키워 거품 붕괴를 막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지만, 현재 국내외 거시경제 흐름을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번 대책은 2010년대 이후 이미 꺼져 있는 주택시장에 계속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잠실 재건축 물량들이 인근 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처럼 말이다.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무모한 정책을 내놓는 정부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다만 매우 무식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집값은 확실히 떨어질 것 같으니 반겨야 할까?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씁쓸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발표로 그린벨트 등 일부 개발 대상지를 중심으로 투기 심리에 기대 섣불리 뛰어들지 말기를 바란다. 투기꾼들의 선동에 의해 일부 지역의 가격 상승은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집값 버블이 붕괴한 후 상당히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부동산문제'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김광수소장님께서 쓰신 글이 아니며 연구소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으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9. 19. 17:15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MIT 슬로안 경영대학원에서 개설되는 수업 중에 ‘시스템 역학(system dynamics)'이라는 수업이 있다. 이 수업에서는 초기에 학생들이 조를 짜서 ‘맥주 유통 게임(Beer Distribution Game)’을 해보게 한다. 필자도 이 수업을 들을 때 실제로 게임에 참여해 보았다. 이 게임은 공급 과정에서 일어나는 시간 지연(time delay)이 생산공장과 유통업자, 도매상, 소매상, 소비자를 거치면서 연쇄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지를 간접 체험해보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각각 소비자와 소매상 등 한 가지 역할을 맡는다. 소비자가 주문을 내면 이에 반응해 소매상--->도매상--->유통업자--->공장으로 이어지며 주문을 내게 된다. 각 단계에서 학생들은 재고를 갖게 되면 한 상자당 0.5달러, 주문 적체(마이너스 재고)가 생기면 한 상자당 1달러의 손실을 보게 된다고 가정한다. 즉, 재고를 최대한 0에 가깝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소비자는 처음 몇 주 동안 4 상자를 주문하다가 이후 8상자로 올려 주문한 다음에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소매상, 도매상, 유통업자, 공장 등에서는 소비자 주문이 8상자로 오른 다음에는 주문이 들쭉날쭉 해진다. 소비자 주문은 8상자로 올라선 뒤 일관됐는데도 각 공급 단계의 반응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또 각 단계별 재고는 +에서 -로 진폭이 생겨나고, 약 20~25주에 걸친 사이클도 생겨난다. 특히 소비자 주문 증가에 대응한 공장의 생산량 증가는 약 15주 후에 절정에 이르렀고, 생산증가량은 주문 증가량의 약 4배였다. 각 단계의 행위자들은 재고량을 최대한 0에 가깝게 만들려 하지만 실제 재고는 크게 넘치거나 모자라는 주기를 되풀이했다. 이 같은 반응은 이 게임이 되풀이 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같았다. 현실의 복잡한 공급 과정에 비해서는 훨씬 단순화된 시뮬레이션인데도 이 같은 진폭과 불안정성이 나타났다. 공장의 기계 고장부터 시작해서 수송 사고, 노조 파업, 양산능력의 한계나 예산 제약 같은 것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는 불안정성이 훨씬 증폭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맥주 유통 과정에서만 발생할까? 아니다. 오히려 시장 수요의 시그널에 반응해 시장에 제품이 재빨리 공급되는(즉, 시간 지연이 적은) 공산품은 덜한 편이다. 공급 과정에서 시간 지연이 많이 생기는 주택시장은 이런 진폭 현상이 훨씬 심하고 진폭의 주기도 길다. 주택 시장의 시간 지연으로 인한 집값의 등락 사이클은 세계 각국에서 오랫동안 관찰돼온 일반화된 현상이다. ‘시스템 다이내믹스’ 수업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는 존 D 스털먼(John D. Sterman) 교수의 명저 ‘비즈니스 다이내믹스'에도 부동산 시장의 버블과 버블 붕괴 현상을 아예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스털먼 교수는 “부동산 시장은 가장 불안정한 주기성을 띤 자산 시장 가운데 하나로 약 10~20년에 걸친 증폭 주기를 가진다”고 적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그 같은 주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의 설명을 인용해보자. (시스템 역학에 나오는 용어는 충분한 설명 없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으므로 일부 표현은 필자가 일반적 용어로 대체하거나 생략했다)

“상업 용지 수요는 경제 활동에 좌우된다. 해당 지역 고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공실률은 떨어진다. 공실률이 낮을 때 임대료는 오르기 시작한다. 임대료 상승은 기업들이 직원 일인당 공간을 줄여 적응함으로써 약간의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요 반응의 탄력도는 낮고 반응 시간은 길다. 공급 측면에서는 상승하는 임대료는 기존 자산들의 수익성과 시장 가치를 높인다. 가격이 높고 상승 중일 때 임대료와 운영 수익은 높고 디벨로퍼들도 상당한 자본 이득을 실현할 수 있다. 높은 수익은 새 디벨로퍼들을 끌어들이고, 그 붐에 편승해서 돈을 벌려는 금융적 지원도 부족함이 없다. 많은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들이 시작되고, 이는 개발 중인 건물들의 공급을 늘린다. 오랜 지연 끝에(2~5년) 임대 공간은 늘어나고 공실률은 떨어지며 임대료도 시장 가치를 끌어내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익이 떨어지면 개발 비율도 떨어진다.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 공급의 균형을 잡으려는 음의 순환고리를 만든다.

새로운 개발 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할 때 디벨로퍼들과 투자자들은 수요와 공급의 성장을 전망함으로써 장래 공실률을 예측해야 한다. (중략) 그렇게 했다면 새 개발 프로젝트 착수율은 임대료가 정점에 이르기 훨씬 전에 떨어졌을 것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공실률이 낮고 수익이 높다 해도 수급 균형을 이룰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한다. 하지만 가격이 정점을 지난 후에야 건물 공급은 정점에 이른다. 공급이 넘쳐나고 공실률이 높아지며 임대료가 떨어진 다음에 말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당장’ 수익이 높다고 본다면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한다. 프로젝트를 끝내는데 2~5년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이 공급과정을 계산에 넣지 못하기 때문에 붐일 때는 건물 과다 공급으로 이어지고 거품이 꺼진 뒤에는 건설 투자가 재빨리 살아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난 100년 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윗글을 보면 최근 한국 부동산 시장 상황이 떠오르지 않는가? 한국의 집값 버블 붕괴도 임박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미분양 물량 급증과 잇따르는 입주율 저조가 공급 과잉 신호를 세차게 보내고 있다. 2008년 6월 현재 미분양 주택 수는 전국적으로 약 15만호. 하지만 실제 미분양 물량은 25만여 가구에 이른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구나 2008년 하반기에 전국 입주 아파트는 수도권 7만7000채를 포함, 모두 25만1000여채나 된다. 이중 상당수가 미분양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2008년 이후 중대형 평형의 집값이 맥을 못 추는 것도 공급시차 측면에서 볼 수 있다. 2001~2003년 집값 폭등기에 중대형 평수 위주로 집값이 오르자 대부분 언론에서는 중대형 평수의 공급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중대형 평형 공급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중대형이 돈이 된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이 사재기를 한 탓도 컸다. 그러다 보니 건설업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중대형 평형을 지어댔다. 이후 이뤄진 대부분 재개발 재건축과 뉴타운 사업이 중대형 평수 위주로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시정연)이 2007년말 펴낸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한 저가 소형주택 확보방안’에 따르면 중대형 평수 위주의 아파트 비중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었다. 2002년의 경우 연립 및 다세대 주택이 전체 서울지역 주택 건설 비중의 64.6%를 차지했으나, 2006년에는 21.3%로 대폭 줄었다. 반면 아파트 건설 비중은 2002년 32.4%였으나, 2006년에는 76.5%나 됐다.

서울만 그런 게 아니었다. 2003년 이후 지어진 수도권 아파트도 중대형 평형이 대세였다. 이 흐름을 가장 강하게 탔던 경기도 용인이 전국에서 아파트 평균 면적이 가장 큰 도시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대량으로 분양됐던 중대형 평수의 입주물량이 쏟아진 서울 잠실재건축 단지나 용인 등 경부축의 중대형 평형이 죽을 쑤는 것도 이런 수급 측면이 강하다. 이렇게 입주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다 보니 이 지역은 심각한 역전세난까지 겪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주로 서민들이 사는 중소형 평형의 공급은 크게 줄었다. 올해 총선을 전후해 노원구와 도봉구, 강북구 등의 집값이 상승한 것이나 최근에도 강북 중소형 평형을 중심으로 전세난을 겪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5~2007년 3년 동안 강북에서만 5만호가량의 소형 주택이 철거된 반면 신축된 소형 주택은 1만4000여 호에 불과하다. 더욱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약 8만5000가구가 철거될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강북 소형주택의 품귀현상이 소형평형 위주의 집값 상승을 유발했고, 투기 세력이 가세해 집값 상승이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동북 3구의 집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기는 어렵다. 우선 거래량이 올해 강북 지역 투기가 극성을 부렸던 2008년 3, 4월에 비해 3분의 1 아래로 뚝 떨어졌다. 추가 매수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또 뉴타운 지역 주민들의 70~80%가 세입자여서 이 같은 수급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매매 수요의 급증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탕’하고 뜨려고 했던 투기꾼들로서는 오히려 스스로 덫에 걸려든 격이 됐다. 수익을 현실화하려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들 지역의 집값은 추가 매수세가 없자 2008년 7월부터는 아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다만 해당 지역 및 인근 지역의 전월세난은 계속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인 뉴타운이 가져온 폐해인 셈이다.

공급과정의 시간 지체로 인한 수급 불균형만이 집값의 거품 형성과 붕괴 사이클을 만드는 요인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경우 그동안 각종 투기적 상황과 정부의 정책 실패, 건설업계와 중앙 정부의 유착, 건설업계의 담합 및 투기에 편승한 분양가 조작, 건설업계의 분양광고를 매개로 한 언론 매체의 선동적 왜곡 보도, 부녀회나 반상회 등 주민들의 집값 담합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투기 현상이나 건설 부패와 담합 등에 의한 집값 상승을 ‘사이비 시장논리’로 정당화함으로써 투기 버블을 확대재생산한 일부 신문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다만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택 수급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제 집값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공급 부족론’을 들고 나오며 이미 10개의 2기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8.21대책’에서 인천 검단과 오산 세교 등 두 개의 신도시를 확대 지정하기까지 했다. 서울시가 이명박 전임시장 시절 지정했던 35개 뉴타운의 주택 공급 물량 30여만호도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말이 35개이지 서울시가 30여년동안 재개발한 물량의 1.5배가 넘는 규모다. 지금도 공급 초과인 상황에서 집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2010년 이후 집값은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정부나 서울시도 부동산 시장 위축 상황을 보며 계획을 수정할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러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공급을 더 확대하라’고 부르짖는 엉터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부동산 시장이 움츠러들면 3~4년 후에는 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다시 폭등한다. 그러니 건축 규제를 최대한 완화해서 계속 공급을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실제로 8.21대책 가운데 추가 신도시 지정이 이 같은 논리에 따라 나왔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그린벨트를 풀어서 주택을 공급하겠다거나 도심 재개발 재건축 활성화를 계속 부르짖는 것도 이런 측면이 있다.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무조건 공급 타령인 셈이다. 향후 공급 위축을 우려해 정말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 뜻이 가상하다. 통폐합 위기에 놓인 국토해양부 산하 토공과 주공을 위한 밥그릇(결국 퇴직 후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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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인 2008. 9. 18. 15:50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인들이 감옥에 많이 가야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PD수첩 방송 내용에 대한 검찰 수사와 민영화 위협 등 현 정부의 방송장악 시도에 맞서서 투쟁하고 있는 문화방송(MBC) 노조의 박성제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추석 전인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MBC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결코 투사형 이미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라고 할까? 그런 그가 자신이 감옥에 가는 것까지 마다 않고 공영방송 사수 투쟁을 벌이는 이유는 뭘까? 그를 통해 한 시간 반 동안 MBC노조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박위원장은 우선 현 정부는 신문 방송 겸영 허용과 방송법 시행령 문제, MBC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 등을 통해 조중동과 재벌 기업들의 언론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자신들의 재집권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현 정부의 방송시장 재편 의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현 정부가 공영방송 KBS나 MBC는 죽이고, 대항하는 보수 편파언론을 만들어 방송시장 판도를 바꿔 여론을 자신들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것”이라며 “방송시장에까지 조중동이 진출해서 군소신문과 군소방송, 지역방송, 종교방송을 모두 무너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신문 방송 겸영 문제가 가장 먼저 터질 텐데, 이 문제가 본격화되면 우리는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KBS나 SBS는 죽는 줄 알면서도 현재 경영진 성향으로는 안 나설 것이고, MBC도 사장이 뚝심 있는 사람은 아니다”며 “그래서 우리 노조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총파업 투쟁이 벌어지면 노조 집행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며 “그렇게 해서라도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공정방송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공정언론을 훼손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막아낸 언론 종사자들의 투쟁이 있었다”며 “공정방송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진보방송, 좌파방송이 아니라 기자와 PD들이 취재한 대로 서민들의 어려움을 전하고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 MBC가 민영화되면 직원들 월급이 더 올라갈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력히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오너를 상전으로 모시고는 공정방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위원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저희는 결코 거창한 신념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이 우리를 가만 안 놔둔다”고 했다. 그는 “소름끼칠 정도로 속이 뻔히 보이는 현 정권의 음모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안 나설 수 없다”며 “많은 분들이 우리 상황을 이해해주고 도와줄 거면 화끈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믿을 것은 결국 여론의 힘뿐이라는 것이었다.

필자도 소위 족벌 신문 기자 출신으로 재직기간 동안 불공정 편파 보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많았다. 그만큼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MBC노조의 결연한 투지가 고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론인이 감옥에 많이 가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우리 사회가 점점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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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제 노조위원장

-방송이 방송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은 MBC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른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달라.

오래전부터 한나라당이 MBC를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선 이후 이 같은 주장이 더 거세졌다. MBC 내부에서도 긴장감이 점점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신임사장이 된 엄기영사장은 원칙적으로 민영화를 반대한다고 했다. 구성원들은 엄사장이 앵커로서 폭넓은 영향력과 신뢰도를 쌓았으니 정권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 동안 PD수첩의 쇠고기 광우병과 관련한 보도가 있었고, 촛불집회 정국이 계속됐다. 코너에 몰려 있던 정부가 7월부터 반격에 나서면서 PD수첩의 방송 내용에 대해 방송통신위와 검찰 등 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 조중동은 국민들이 PD수첩의 왜곡보도에 놀아났다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가 MBC의 내홍을 불러왔다. MBC 내부에서는 전체적으로 PD수첩의 방송 내용이 크게 문제 있었다고 보지 않았다. 일부 오역이 있었지만, 검찰수사를 받을 사안은 아니었다. 이를 빌미로 정부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제작진을 체포하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방위적인 집권세력의 압박에 대응해야 했다. 지금 당장 탄압을 받아 힘들더라도 그 길이 장기적으로 공영방송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대부분 직원들은 생각했다. 정권이 PD수첩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다. 방송 내용이 왜곡됐다면 언론중재 등 법에 정해진 절차를 밟으면 되는데 검찰을 동원해 압박하는 것은 국면 전환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에서 터졌다. 엄기영 사장이 정권의 압력에 굴복했다. 엄사장은 ‘PD수첩 방송 내용에 대한 정부의 사과방송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더라. 이유는 정권과 끝까지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금 실수한 것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사장도 우리 잘못이 별거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정권과 끝까지 싸우는 데 대한 부담, 광고 압박에 대한 부담 등을 우려했다. 겁을 먹은 것이다. 우리 노조는 이러한 자세가 대단히 잘못 됐다고 봤다.

사과방송 이후에 정권의 민영화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신문방송 겸영 등 매우 큰 문제가 있는 미디어 정책을 정권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다. 방통위 업무보고에서 이미 큰 줄기가 나왔지만, 한나라당이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간다면 우리도 총파업 투표를 하고 다른 방송 및 조중동을 제외한 신문들과도 연대 총파업을 진행할 것이다. 검찰이 PD수첩의 PD들을 체포하느니 마느니 하고 있어, 지금 2주 넘게 24시간 지키고 있다. 20여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사수대를 운영하고 있다. 노조집행부도 사무실에서 계속 철야를 하고 있다. 우리 노조는 경영진과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굴욕적인 사장의 처신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보신주의적이고 정권에 거슬리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는 경영진이 한심하다. 우리 노조는 사과방송 이후 경영진측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그런데 최근에 또 일을 저질렀다. PD수첩 담당 PD를 인사조치한 것은 넘어갔지만, 이번에 엄 사장이 직접 발탁한 시사교양국장을 6개월만에 교체했다. 정권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고 있으니 봐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영진과 노조가 똑같이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행태는 너무나 굴욕적이고 MBC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다.

 그리고 정세 판단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우리가 엎드린다고 해서 MBC에 대한 정권의 압박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휘두르니 엄사정이 굴종하고 타협한다고 생각해 더 만만하게 볼 것이다. 그래서 우리 노조는 정권과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경영진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타협하자는 쪽으로 몰고 간 부사장과 기획조정실장에게 직접 퇴진을 요구했다. 이번 주부터 피케팅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 엄기영 사장 체제 6개월의 문제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할 생각이다. 조합원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 위한 것이다. 일반 사원들에 비해 노조 집행부가 너무 강경하다고 경영진은 말하는데 정말 그런지 보자는 것이다. 설문결과에 따라 노조집행부에게 싸우라고 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강하게 투쟁하고, 안 그렇다면 접겠다.

 -조합원들의 설문 결과가 투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올 것이라고 믿나?

당연히 자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PD수첩 사과방송 나갔을 때 서울에 있는 1000명 조합원 중에 3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나왔다. 노조원간의 분열은 전혀 없다. 일부 간부들은 너무 싸우면 안 된다고 경영진에 말했을 수 있지만 전체 노조원 생각은 다르지 않다. 조합원이 아닌 대부분 간부 선배들도 노조가 잘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엄사장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노조가 제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엄기영 사장은 최장기 앵커를 하며 국민들에게 상당히 신뢰받는 언론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나?

 본인의 캐릭터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언론인으로서 쌓아온 체면과 이미지가 있으므로 중요한 순간에 원칙과 정도에 맞는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가 어긋났다.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다. 사장 본인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기보다는 주변 사람들 얘기에 자꾸 휘둘리는 것 같다. 지금 경영진이 보수적이다. 임원들의 생각은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야 연임도 하니 노조나 젊은 사원들의 강경한 태도를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할 수 있다. 심지어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문순 사장 때도 임원들은 그런 경향이었다. 사실 임원들은 그런 측면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서로 보완이 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영방송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방송민주화 투쟁을 통해 쌓아온 공영방송의 전통을 버리고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MBC는 노조가 운영하는 노영방송’이라는 비판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있다. 올해 방송 드라마 시청률이 안 좋아 경영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노조는 경영진에게 ‘고통 분담할 생각이 있다. 그러니 돈 문제는 너무 걱정 말고, 외풍을 막아달라’고 주문했다. 현 상황에서 언론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외압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경영진이 그걸 못하고 있다. DJ나 노무현 정부 때도 외풍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풍은 사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문순 사장 때와 비교한다면 어떤가?

당시에는 정권이 부탁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권력기구나 여당까지 나서서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삼성X파일 때나 황우석 보도와 관련해서도 외풍이 있었다. 황우석 교수 보도 때는 처음에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기에 훨씬 위기감이 더 컸다. 나중에 우리 보도의 진실이 밝혀져서 그랬지, 안 그랬으면 회사가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향후 방송법 시행령 개정 문제가 현 정부의 방송시장 개편에서 핵심적 쟁점이 될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방송법 시행령 개정의 핵심은 현행 자산총액 3조원 이하 기업에서 10조원 이하 기업까지 종합방송 및 보도방송 소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CJ의 자본금이 10조 3000억원이다. CJ는 자산을 약간 조정하면 당장 내년부터 10조원 이내로 맞출 수 있다. CJ는 이미 10여개 안팎의 채널을 갖고 있다. CJ는 아직 삼성과 무관하지 않다. CJ뿐만 아니라 현대, 엘지 등 재벌 기업과 연관된 회사들이 지상파 방송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 그렇게 되면 전체 TV 시청가구 1900만가구 가운데 1500만가구가 케이블을 통해 보고, IPTV가 150만 가구 정도 된다.

이렇게 되면 지상파와 케이블의 종합편성채널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케이블을 뭉쳐서 종합편성하고, 정권의 지원을 받아 채널 12번, 13번으로 들어오면 일반 공중파 TV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공중파이므로 중간광고도 못하는 등 전체적으로 광고 규제를 많이 받는다. 광고 영업도 할 수 없고, 요금도 코바코(KOBACO.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묶고 있다. 그런데 케이블 PP(프로그램 공급업자)는 그런 규제를 전혀 안 받는다. 게다가 조중동과 재벌 기업들이 컨소시엄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조선일보가 CJ나 현대와 합쳐 신문과 패키지로 영업한다면, 기존 공중파가 위협받는 상황이 된다.

조중동은 신문으로 돈을 못 버니, 방송으로 돈벌이하려 하는 것이다. 방송시장에까지 조중동이 진출해서 군소신문과 군소방송, 지역방송, 종교방송을 모두 무너뜨릴 것이다. 언론판도 자체가 조중동과 대기업 위주의 종합편성 채널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여론도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특별히 MBC나 KBS2를 민영화 안 시켜도 된다. 신문과 방송 겸영을 허용하면 이미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다. 기존 공중파 방송을 약화시키고 우호적인 족벌언론 세력을 키워주면 우파 정권 재집권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신문 방송 겸영 허용과 방송법 시행령 문제, MBC 방송문화진흥회법 등을 개정하려는 것이 모두 같은 의도 때문이다. 공영방송 KBS나 MBC는 죽이고, 대항하는 보수 편파언론을 만들어 방송시장 판도를 바꿔 여론을 자신들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신문 방송 겸영 문제가 가장 먼저 터질 텐데, 이 문제가 본격화되면 우리는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다. 3개 방송사와 조중동 이외 나머지 신문들이 일제히 비판하면 정권의 시도를 막을 수 있다. KBS나 SBS는 죽는 줄 알면서도 현재 경영진 성향으로는 안 나설 것이다. MBC도 사장이 뚝심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노조가 나설 수밖에 없다. 총파업 투쟁이 벌어지면 노조 집행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인들이 감옥에 많이 가야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킬 수 있다. 우리가 먼저 몸을 던져야 한다면 던지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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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의한 PD수첩 제작진 체포를 막기 위해 농성하고 있는 MBC노조원들.(MBC노조 제공)


-말씀을 들어보면 의지가 아주 결연한데, 원래 투사형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도 원래 결연한 놈이 아닌데,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고 있다. 내 임기가 내년 2월말까지인데 남은 5,6개월의 상황이 예상대로 간다면 팔자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나도 마찬가지지만 MBC에 빨갱이나 과격한 사람은 없다. 다만 소중한 일터와 민주주의 국가 언론의 기본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노조위원장을 맡게 됐나?

 MBC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선으로 노조위원장을 뽑은 적이 없다. 직능별로 차장급 정도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선후배들이 폭탄주를 먹이며 회유와 협박으로 (그는 이 대목에서 빙긋이 웃었다) 끌고 내려와 노조위원장을 시키는 게 전통처럼 돼 있다. 노조위원장을 맡고 보니 집에서 타박이 심하다. 7월에 KBS지키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언론노련 위원장과 함께 경찰서에 연행됐다 나온 적이 있는데, 그때 집에서 타박을 많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경찰서에) 들어갔다가 못 나오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더라.

-MBC민영화에 대한 정부 의지는 어느 정도로 보나?

엄청 강하다. 하지만 정부 뜻대로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DJ정부 때도 정부가 MBC민영화를 시도했다. 당시 방송개혁위원회가 정치인과 시민단체들로 구성해 지역MBC부터 시작해 본사도 판다고 했는데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좌절됐다.

우선 특혜논란이었다. MBC를 재벌에게 주면 특혜다. 중소기업에 준다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이든 MBC을 인수하는 순간 재벌이 된다. MBC의 자산가치가 10조~20조원이나 된다. 그리고 MBC는 지금도 매년 수백억원의 순이익을 낸다. 전국 MBC가 갖고 있는 부동산을 생각해보라. 태영이라는 중견건설기업이 SBS를 인수하면서 재벌이 된 것을 생각해보라. 어떤 회사든 MBC를 인수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 뉴라이트쪽의 김우룡 교수 같은 이는 국민주 방송을 운운하는데, 국민주 하는 순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쪽의 정수장학회가 30%의 지분으로 최대 주주가 된다. 그런 상황은 이명박 정권이 별로 안 좋아할 것이다. 이런 난관들이 많이 있다.

MBC의 소유구조가 이렇게 된 데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80년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정수장학회 이외 지분 70%를 KBS에 줬다. 87년에 법을 개정해 방문진이 대주주가 되고, 방송위원회에서 이사들을 임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MBC 경영진을 방통위가 임명하도록 된 것이다. 정권에 따라 성향이 바뀌지만 6대 3 또는 5대 4정도로 친여권 성향 인사들이 방문진 이사가 된다. 지금은 노무현 정권 시절 이사회지만 곧 한나라당 성향 이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과거 10년 동안은 MBC가 정권에 그다지 휘둘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김중배씨 같은 분이 사장으로 오기도 하고, 노무현 정부도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긍희 같은 보수적 인사가 사장이 되기도 했다가, 최문순 같은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장이 되기도 했다.

-박위원장의 이야기는 ‘MBC가 정파적 입장에서 한나라당을 편파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 집권세력의 시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김중배 사장은 방문진 이사들이 작당해서 청와대에서 미는 사람을 제끼고 모셔온 분이다. 김중배 사장이 와서 MBC 독립성을 확립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워낙 배짱이 좋고 언론계 거물이니 가능했다. 김중배 사장은 전 직원들에게 ‘외압 걱정 말고 소신껏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 미디어비평 같은 프로그램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영방송은 그동안 진행해온 방송민주화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MBC를 관제방송으로 만들자거나 민영화하자는 것은 이명박 방송이나 재벌방송을 하라는 것이다. 특히 국민주 방송을 운운하는 것은 미끼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완벽한 국민주방송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 사장을 뽑을 때 완벽히 독립된 사장을 뽑는다면 현 정권에 안 좋겠지. 지금은 방문진 이사들을 통해서라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전혀 제어할 수 없는 방송이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것을 정부가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국민주 방송하자고 몰고 가면서 민영화 등 다른 꼼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MBC를 민영화하려고 한다면 정부가 어떤 식으로 갈 것 같은가?

KBS에 대해 국가기간방송법을 만들려 한다. KBS와 EBS는 한데 묶어 국회가 통제하고, KBS2는 민영화하려 한다. 그런데 NHK가 사실 중계방송으로 흐르고 힘이 약한 방송이 된 것은 정권에 묶여서 그렇다. 일본의 나머지 민영방송들은 상업 방송으로 모두 수익만 추구하는 방송들이다. 언론으로서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MBC를 그런 식으로 관제방송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민영화하라고 협박할 것이다.

-현 국면에서 정권의 방송 장악 기도를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죽도록 싸우는 방법 밖에 없다. 6.10 때 100만명 모였을 때 그때만 해도 국민들이 MBC 민영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의 악랄한 탄압 때문에 사람들이 겁을 먹어 촛불이 사그라들었다. 나도 서너번 촛불집회 나가봤지만, 8월 이후로는 정말 무섭더라. 정권이 다 잡아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겁이 나서 집회에 못 나간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국 잠재된 여론을 잘 살려야 한다. 정부의 방송장악 진행과정을 잘 알려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총파업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야당은 이제 방송 장악 기도를 막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깨달은 것 같다. 방송을 빼앗기면 절대 재집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는 극한 상황을 맞아야 국민들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92년 MBC에 공권력이 들어와 기자와 PD들이 끌려간 것과 같은 상황이 다시 올 것이다. 우리도 피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너무나 확실히 보인다. 피할 수 없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할 생각이다.

-KBS와 YTN에는 어쨌든 정권에서 미는 인사가 사장으로 왔고, KBS는 노조원들마저 분열돼 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나?

KBS가 보조를 맞춰 주면 좋은데, KBS 내부의 문제가 있는데다가 노조가 임기말이다. 사원행동이라는 조직이 있지만, 노조라는 합법적 조직에 기반해서 싸우는 것보다 힘이 달릴 수밖에 없다. 총파업이나 노동쟁의가 쉽지 않다. 현재 노조는 팔짱끼고 있으므로 지금 상태라면 KBS와 함께 싸우는 것은 쉽지 않다. MBC가 총대를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SBS 노조는 생각이 우리와 똑같지만 오너가 있는 기업이어서 한계가 있다.

국정감사 끝나는 10월말이면 총파업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YTN에 공권력이 투입된다면 연대 투쟁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총파업을 앞당길 수도 있다. KBS 신임 사장 임명 때도 KBS노조가 파업 들어가면 같이 파업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몇 가지 변수가 생기면서 발을 담글 수 없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공영방송 사수라는 굳은 결의를 갖고 있어 총파업으로 가는 데는 별 문제 없다.

-결국 국민 여론이 호응해줘야 총파업을 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 여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가?

국민들이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조중동이라는 집단의 실체에 대해 많이 알게 됐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여론을 왜곡하는지 알게 됐을 것이다. 또 현재 진행되는 정권의 작업이 방송을 조중동에 넘기기라는 것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현 정부 미디어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결성된 미디어공공성 포럼에 참여한 200여명의 언론학자들은 진보, 보수를 망라한다. 이런 학자들이 모여서 현 정부 언론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훨씬 우호적인 환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 많은 분들과 함께 힘을 모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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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인 질문을 하겠다. 공정방송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왜 공정방송이 중요한가?

공정방송이 꼭 정부를 비판하거나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언론자유라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공정방송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작진들이 자유로이 취재하고 각자의 양심에 따라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공정방송이다. 지금 한국 언론을 크게 나눠보면 사주 있는 언론과 사주 없는 언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MBC, KBS와 한겨레와 경향, 서울신문처럼 사주가 없는 언론과 사주 있는 언론들의 논조는 매우 많이 차이 난다. 경향이나 한겨레가 자율적으로 우리 정치, 사회 환경을 직시해서 쓰는 것은 공정언론이다. 제대로 된 공정언론은 어떤 정권이든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공정방송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공정언론을 훼손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막아낸 언론 종사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MBC 노조도 마찬가지다. MBC가 첫 파업했던 것은 88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방송을 정권이 못 내보내게 해서였다. 또 우루과이라운드와 연관해 농촌의 현실을 방영하지 못하게 할 때도 파업을 했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며 파업하기도 했다. 노조 파업이 대부분 그런 역사를 갖고 있다. 공정방송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진보방송, 좌파방송이 아니라 기자와 PD들이 취재한 대로 서민들의 어려움을 전하고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이 인정받았고, 그래서 지난 10여년 동안 언론자유와 공정방송이 많이 신장돼온 것이다.

사실 MBC가 민영화되면 직원들 월급이 더 올라갈 것이다. 정권도 그런 점을 부각시키며 우리들을 회유하려 할 것이다. 민영화돼도 나이 든 간부들이나 잘릴 걱정할까 젊은 조합원들은 걱정 안 한다. 기자나 PD들은 민영화되더라도 오너가 데리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력히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오너를 상전으로 모시고는 공정방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노조가 밥그릇을 챙기고자 한다면 차라리 민영화가 낫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KBS노조가 논란에 휩싸이면서 MBC 노조를 사람들이 많이 주목한다. 네티즌들이나 시민단체나 학자들이 ‘이제 MBC 노조밖에 안 남았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책임감이 많이 들고, 부담도 된다. 저희는 결코 거창한 신념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이 우리를 가만 안 놔둔다. 착실하게 회사에 다니던 회사원들, 수업 받던 학생들이 못 참아서 촛불을 들고 나왔듯이, 우리도 가만히 일만 하고 싶은데 상황이 우리를 계속 내몬다. 소름끼칠 정도로 속이 뻔히 보이는 현 정권의 음모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안 나설 수 없다. 너무나 한심하고 황당한 정권의 작태가 우리를 투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다. 많은 분들이 우리 상황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도와줄 거면 화끈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 나라꼴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한심하다. 미디어공공성포럼 출범식 갔을 때 만난 한 언론학자가 촛불집회에서 여중생, 여고생들이 ‘언론장악 반대’ 팻말을 만들어 들고 나왔을 때 너무 부끄러웠다고 하더라. 그런 국민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언론개혁'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연구소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으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9. 17. 08:25



정부가 ‘광역경제권 선도 프로젝트’ 사업에 향후 5년간 56조원을 투입한다고 하는군요. 이 가운데 53조여원이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및 산업단지 조성 등 개발사업에 들어가는군요. 겨우 2조3000억원이 지식산업 및 첨단기술산업 지원에 투입되는군요.

 

이 계획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이 듭니다.

 

우선, ‘삽질경제학’의 대가이자, 건설족의 우두머리 출신 대통령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경제대통령’으로 포장했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경제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마땅한 방법을 모르겠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려면 부동산 거품을 빼고 국가 정책의 틀을 콘크리트가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될 리 없죠.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추진해도 어려운 문제인데, 반칙과 편법, 부정이 판치던 개발경제 시대의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 개념조차 가지고 있을까요?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등 자산경제가 지나치게 부푼 상태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계속 급전직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잠재력을 제대로 확충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전시행정과 단기 눈속임 성과주의의 귀재인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언행이나 정부 정책을 보면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확충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대통령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전공 분야이고,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개발 사업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하면 각 지역에도 선심을 쓰는 격이니 정치적으로도 득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 잇따른 정부 발표를 보면 정부가 내심으로는 개발사업을 통해 시중유동성을 확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건설업체들에게 사실상 특혜금융을 주는 환매조건부 미분양 매입 등 건설업체들에게 종합선물세트를 안겨준 ‘8.21 대책’을 비롯하여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 재개발 재건축 완화, 새만금 개발 본격화, 죽어가던 한반도 대운하 되살리기, 그리고 이번 광역경제권 개발 발표 등이 모두 대규모 개발 사업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9월 위기설’이 사실상 소멸됐다며 의기양양해 하지만, 원래 9월에 외환을 통한 위기가 바로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속병을 가진 구조적 위기이지, 단기적 위기가 아닙니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 내수 침체, 자산 및 소득 양극화, 성장 잠재력 고갈, 막대한 가계 부채 급증 등이 부동산 버블을 고리로 지난 10년간 확대 재생산돼온 상황입니다. 한국 경제의 핵심 위기는 오히려 이처럼 외환위기 이후 누적돼온 구조적 위기입니다. 그런데 정부도 내심 부동산 버블이 붕괴될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그것이 가져올 신용 위축 사태가 우려되겠지요. 그래서 각종 개발사업과 전매제한 완화 조치 등을 통해 시장에 돈이 돌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라든지, 새만금 개발사업 추진, 한반도 대운하 되살리기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서울과 수도권에서 민간이 추진하는 초고층 프로젝트 등 대규모 개발프로젝트들이 많지만 당장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사업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는 다릅니다. 롯데그룹 계열사 부사장 한 분은 저와의 전화통화에서 “경기를 살리려면 당장 돈을 풀 수 있어야 하는데, 다른 데는 자금 조달하는 데만 상당한 기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수조원의 현금을 바로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롯데그룹 차원에서는 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내세워 이번 허가를 땄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정부가 살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말은 물류니, 관광이니 내세우지만 자신들도 제 정신이라면 이게 안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정말 자신들 생각을 믿는다 해도 향후로는 시중 유동성 확대라는 차원에서 진행하려 할 것입니다.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를 통해 외국자본까지 유치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이번 ‘9월 위기설’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정부 스스로도 잘못하다가는 외환 유동성 위기가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고 느꼈을 겁니다. 실제로 건설업계 안에서는 정부가 대운하 되살리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특히 새만금 사업의 경우에도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를 통해 외환 유동성을 확충하려는 의도가 상당히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추정에 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하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해소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경제의 핵심적 문제들인 소비 위축, 내수 침체, 실업률 증가, 양극화 확대, 고물가 고비용 구조 등의 문제는 상당 부분 부동산 거품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우선, 가계부채의 증대와 이에 따른 이자 부담 증가로 가계의 소비 여력이 급격히 위축됐습니다. 또한 소비재와 달리 가장 값비싼 생활 필수재인 주택 값은 상승하면 그만큼 실질 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또 주거비 부담이 상승하면 이를 부담하기 위한 임금 상승이 합리화돼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집니다. 자산 양극화가 심해지고 이로 인한 사회적 위화감도 증대됩니다. 토지 비용의 상승으로 경제가 고비용 구조로 흐르게 돼 중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거품은 형성되면서 이미 막대한 경제적 폐해를 낳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부동산 등 자산 경제의 영역과 생산경제의 영역이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 자원이 부동산에 편중되도록 집값 거품을 키우고 유지하면서 7~8년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현 정부는 집값 거품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여기에다 지금 대규모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각종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의 개발 사업들이 막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각종 개발사업들을 또 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발사업들이 모두 필요한 것이라면 말도 안 하겠습니다. 당장 이번에 발표한 계획만 봐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수두룩합니다. 예를 들면, 대구, 구미, 포항, 광주·전남, 서천 등 5곳에 새로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존에 형성된 산업단지와 과학기술테크노파크 등의 사업과 뭐가 다른지 의문입니다. 문제는 산업단지 조성을 통한 부지 제공이 아닙니다. 기존 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이 기술과 지식, 정보를 공유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 ‘연계 혁신(connected innovation)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한 클러스터는 부지라는 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교와 연구소 등이 기업들과 강력히 연계된 성장연합을 이뤄갈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 세계 각국이 추진하는 첨단산업클러스터를 통한 경제성장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전 없이 새로운 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부동산 개발사업에 불과합니다. 산업단지가 제대로 된 의미의 클러스터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부동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입주기업들에게 땅장사를 하게 하기 십상입니다. 더구나 얼마 전 KBS스페셜에도 나왔지만, 지방 및 수도권의 제조기업들은 오히려 한국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산업용지에 대한 수요는 줄어드는데 새로 산업단지를 조성하면 거기에 얼마나 들어설까요?

 

동남권역에 조성하겠다는 ‘동북아 제2허브공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강원도 양양과 경북 울진, 전남 무안 등 지방 공항들이 페쇄되거나 이용객들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더구나 경남 김해공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새로 공항을 짓는다면 충분한 수요가 생길까요? 마산∼거제 연륙교를 지어 해양관광을 활성화한다거나, 대경권에 3대 문화·생태 관광기반 조성을 한다는 사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전 정부에서 앞다투어 나섰던 대규모 관광개발 사업들 중에 지금 성공한 것이 있습니까?

 

한 마디로 그냥 개발사업을 했을 뿐, 이후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신경을 안 쓰는 것이 지금의 정부관료들입니다. ‘공급을 하면 수요는 생긴다’는 근거 없는 희망에 따라 개발계획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는 개발시대 때에나 통하던 방식입니다. 개발시대 때에는 기본적인 사회인프라가 부족하니 짓기만 하면 다 수요가 생겨나고 성장 잠재력 확충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웬만한 사회기반시설은 대부분 마련돼 있습니다. 이런 콘크리트 사업에 투자해봤자, 성장 잠재력이 얼마나 확충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용하지도 않는 공항, 도로, 관광지를 만들어놓는다고 그게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장 주변에 사시는 곳부터 한 번 확인해보세요. 제가 서울시에 재직하면서 느꼈지만, 도서관 짓는데 100억원 이상이 들어가는데 정작 매년 도서 구입비 예산은 1억원 남짓합니다. 그러니 도서관에 가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문예회관이나 공연장이라며 수백억원을 들이는데 정작 짓고 나면 질 낮은 프로그램밖에 안 돌아갑니다.

 

제가 사는 일산 킨텍스나 종합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확인은 안 해봤지만, 두 곳 모두 짓는데 수백억원에서 1000억원대는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일산 킨텍스는 일년 중 제대로 행사가 열리는 날이 아마 10일 안쪽일 겁니다. 그렇게 커다란 건물을 지어놓고는 안에서 뭐하는지 아십니까? 겨울에 인공 눈썰매장 한 켠에서 운용하고, 여름에 간이 물놀이장을 만들어 운영합니다.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기존에 있는 킨텍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지금 제2킨텍스를 짓는다고 난리입니다. 종합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2부 리그팀이 경기하는 게 일년에 10여차례에 불과한데, 그 외에는 그 큰 운동장이 텅 비어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도대체 시민들에게 거의 아무런 혜택도 돌아오지 않고, 경제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막대한 개발사업을 누구를 위해 하는 겁니까?

 

그럼 돈들이 남아돌아서, 다른 데는 쓸 데가 없어서 이런데 쓰고 있을까요? 몇 년 간 아이들을 키우던 제 처가 얼마 전부터 사회복지사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소득층 노인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한국의 열악한 복지 현실에 마음이 찢어질 정도랍니다. 장애 때문에 생활도우미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변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노인, 가만 있던 집값이 재개발 붐에 4000만원에서 8000만원으로 올라 자활대상자 지원에서 제외된 노인, 한 달 생활비 10만원 정도로 버티며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떼우는 사람 등등. 아내가 담당하는 케이스만 220가구. 그런데 아내와 동료 사회복지사 한 명의 급료를 포함해 220가구를 대상으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배정된 1년 예산은 겨우 1억5000만원이랍니다. 아내는 예산이 1,2억만 더 있어도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며 안타까워합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거의 아무런 효과도 없는 일들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전체로 매년 수십조원씩 쓰면서 당장 기초적인 사회복지 체계도 제대로 구축을 못하고 있다니요. 그런데 아직도 정부 관료와 정치권은 이런 개발사업 만드는 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왜냐? 나중에야 어떻게 되더라도 뭘 만들고 짓는다 하면 사람들이 혹하니까요. 정치권은 표 얻을 수 있고, 뒷돈 받을 수 있으니 좋고, 관료들은 눈에 안 보이는 복지 프로그램 돌리느니 생색나는 실적 만들어서 좋고, 건설업체들은 사업으로 돈 벌어서 좋습니다. 관변 학자나 연구소들은 용역 프로젝트 많아져서 좋고, 언론들은 건설업체들 광고 물량 많아져서 좋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개발 옹호세력들을 저는 ‘개발 5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토건족, 건설족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일본도 버블이 붕괴할 때 토건족의 압력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가 경기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개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요도 없는 댐이 지어지고 노루와 토끼만 다니는 도로도 숱하게 생겼습니다. 많은 리조트와 골프장은 버려지고 도산했고요. 이런 개발사업에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 재정 고갈을 부추겼습니다. 이미 한국에서도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아직도 ‘개발만이 살길’인 것처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판에 부유층을 위해 막대한 감세안까지 동시에 진행하고 있으니 재정건전성에 대해 한국 정부는 최소한의 고민은 하고 있을까요?

 

이제 개발경제 시대 때의 경제 운용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가계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경제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비용 대비 효과나 수요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개발사업으로는 선진경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이들이 첨단기술경제 시대이고, 지식정보화 시대, 창조경제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국가 전체의 자원 배분이 이런 영역으로 배분되도록 해야 합니다. 첨단 기술을 고안하고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한 국가경제의 자원은 유한하기에 제한된 자원 안에서 최적의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자원 배분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사람에게 투자해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창출하고, 첨단기술을 육성합니다. 한국 같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창조적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산 가공하고,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인재를 키워냅니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 보스턴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보스턴에 대규모 공장이 있는 것도, 고층 아파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100년 이상 된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웬만한 도로는 누더기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보스턴이 못 사는 동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스턴의 평균 가구 소득은 미국 평균의 약 2배 정도입니다. 소득 수준으로는 미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 도시입니다. 싱가폴이 2000년대 초반 일시적인 불경기로 휘청거릴 때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았던 도시도 바로 보스턴입니다. 보스턴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은 싱가폴 경제는 이후 생명공학기술과 의료산업 등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보스턴에 뭐가 있길래 행정구역상으로 60여만명, 광역 보스턴(Greater Boston)으로 따져도 340만 정도에 불과한 도시가 그렇게 두각을 나타낼까요?

 

보스턴에는 인재가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과 MIT, 보스턴대학(BU), 보스턴칼리지(BC),터프츠 대학 등을 필두로 100여개의 각종 대학들에서 매년 엄청난 인재가 쏟아져 나옵니다. 많은 인재들이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진출하기도 하지만, 보스턴에 남아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합니다. 하버드 의대 협력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을 중심으로 의료산업이 발달해 있고, 관련 분야에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을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제약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MIT를 중심으로 한 각종 IT산업과 로봇공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재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미국 전역에서 이전해옵니다. 또한 인재들은 자신들의 벤처기업을 만들어 미래의 빌게이츠를 꿈꿉니다. 베인 앤 컴퍼니나 보스턴 컨설팅그룹 등 세계 유수의 컨설팅펌들도 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역시 보스턴에서 배출된 우수한 인재들이 이들 회사의 토대가 됐습니다.

 

보스턴 필하모닉과 보스턴 발레단처럼 보스턴은 젊은 예술혼과 창조성이 살아 숨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인구 60만의 도시에 공립도서관만 36개나 됩니다. 인구 1000만의 도시 서울에 ‘독서실 같은 도서관’이 아닌, 진짜 공립도서관이 30개도 채 안 되는 것과 너무나 비교됩니다. 이런 보스턴 경제의 활력이 모두 사람과 교육, 문화에서 나왔습니다. 제대로 된 선진경제가 가는 길이 바로 이런 방향입니다. 한국 경제가 미래를 기약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도 가야 하는 방향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결국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자식 세대가 살 수 있는, 한국 경제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첫 걸음은 무턱대고 내지르는 토건국가적 개발사업 남발을 자제해야 합니다. 충분히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각종 건설토목사업에 돈을 쏟아 붓는 과거 일본과 같은 토건국가적 행태는 멈춰야 합니다. 대신 그렇게 아낀 돈을 저렴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질 좋은 교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초중고 과정에서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강화하는 교육을 만들고, 오히려 ‘경쟁의 무풍지대’인 대학이 경쟁하도록 해야 합니다. 재벌 기업들의 독과점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구조 대신 국내시장에서도 국제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몸과 마음을 키울 수 있는 더 많은 도서관을, 더 많은 문화공연장을, 더 많은 체육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소득층과 노후세대를 위한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체계적으로 마련해가야 합니다. 제대로 된 공공건설사업 발주 시스템을 만들면 이를 위한 예산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주택 및 부동산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진국 대비 5%도 안 되는 공공주택 재고를 20~30% 수준까지 높여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등 자산 거품을 만들지 않는 부동산 세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후분양제 확대와 공공부문의 주택 원가 공개 등 소비자 중심의 주택 시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콘크리트가 아닌 사람에게 투자하는 경제에 희망이 있습니다. 땅과 집이 아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제대로 키우는 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식세대 홀로, 또는 부모세대 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합심해서 힘과 지혜를 모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by 선대인 2008. 9. 12. 15:30

그제(9월 9일)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와 어머니 우갑선씨를 만났습니다. 약 10년 만의 재회입니다. 점심 약속 장소로 가는데 가슴이 뛰더군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소녀. ‘희아’라고 불렀던 소녀는 이제 23살의 숙녀 ‘희아씨’가 됐습니다. 하지만 동안(童顔)인 희아씨는 10년 전 모습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제가 이희아씨와 무슨 관계냐고요? 하하.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이던 99년 초 희아씨의 사연을 사회면 톱 기사로 소개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결혼 전의 아내가 희아양 얘기를 처음 전해주었습니다.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희아양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했습니다. 처음에 무척 꺼려하던 희아양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몇 차례 통화한 끝에 가까스로 인터뷰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비 내리는 밤길을 달려 서울 강동구에 있던 희아양 집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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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티 없이 맑고 환한 얼굴. 당시 희아양의 첫 느낌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어머님으로부터 희아양의 사연을 듣는데, 가슴이 자꾸 뭉클해졌습니다. 차에 남아있던 아내가 몇 번씩 핸드폰을 울렸지만, 좀처럼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칠 무렵, 희아양이 ‘즉흥환상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아!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 네 손가락만으로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다니! 그것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습니다. 희아네 가족의 땀, 눈물, 애환, 열정, 희망, 애정이 녹아 있는 결정체였습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의 꿈을 이루려는 가열찬 투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인 다음날 출근해 기사를 출고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없어 고심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데스크로부터 몇 번의 재촉을 받고 보낸 기사는 사회면 톱 박스로 큼지막하게 편집됐습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카인즈'에서 찾아본 그 기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은 없다"-네 손가락 소녀피아니스트 이희아양


'네 손가락의 즉흥환상곡.’서울시 교육청과 한국재활재단이 초등학생들의 독후감 모집을 위해 나누어준 책의 이름이다. 태어날 때부터 두 손 다 합쳐 손가락이 4개밖에 없는 열네살 소녀의 스토리. 그러나 피나는 노력 끝에 전국 피아노 연주대회에서 ‘열 손가락’ 유치부 어린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을 차지했다.


오늘도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9년째 건반에 매달려 사는 서울 주몽초등학교의 이희아양(14·6년)얘기를 담은 책(동화작가 고정욱 기록)표제다. 24일 마감된 독후감 모집(2월6일 당선작 시상)에 응모한 어린이만도 무려 2천여명.


“사람의 작은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장애인친구도 함께 살아가야 할 내 친구가 아닌가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독후감을 적어 낸 한 어린이의 소감이다.


희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손가락’이 전부였다. 두 다리도 없다. 선천성 기형으로 막대기처럼 가늘게 붙어 있던 다리도 세살 때 절단했다. 그래서 페달은 특별히 피아노 위쪽에 붙여 허벅지로 조작한다.


67년 대간첩작전에서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된 아버지 이운봉씨(54)와 간호사로 이씨를 돌보던 어머니 우갑선씨(44·산부인과 조산원) 사이에서 태어난 희아. 기형의 원인은 엄마가 임신사실을 모르고 감기약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여섯살이던 91년 희아에게 연필이라도 쥐는 삶을 열어 주려고 시작한 피아노연습. 받아 가르쳐주는 학원도 없어 석달여를 떠돌아 다니다 ‘숲속피아노학원’ 원장 조미경씨(31·여)를 만났다. 조원장은 우씨가 일하던 산부인과에 입원했다가 희아의 사연을 알게 된 것.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과 오후로 나눠 10시간에 이르는 연습이 시작됐다. 그러나 희아가 짚는 건반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더 힘을 줘.” “안돼. 안돼. 그 부분 다시.”

또래 어린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간 뒤에도 희아와 조씨의 1대1교습은 거듭됐다. 몸살로 앓아눕고 네 손끝에 물집이 잡혔다. 네 손가락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화음은 빠른 손놀림으로 쫓아가야 했다. 그렇게 3개월여가 지나자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학교종이 땡땡땡…’을 끝까지 치던 날 온가족은 울어버렸다.


네 손가락 솜씨는 빠르게 발전했다. 1년여 뒤 참가한 전국학생음악연주평가회에서 희아는 와이만의 ‘은파(Silver Wave)’를 연주, 유치부 최우수상을 따냈다.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행진은 계속됐다.


희아는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96년 일본 장애인재활시설인 ‘꿈의 공방’을 방문해 연주하고 97년에는 국내장애인을 위한 독주회를 열어 수익금 1천만원 가량을 장애인단체에 기부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희아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 하지만 지난해의 뇌출혈 후유증으로 요즘 장시간 연습이 힘들다. 그래도 어렵고 어렵다는 베토벤 소나타 24번 ‘열정’을 하루 3,4시간씩 두드리며 꿈을 불태운다.


“아무리 해도 베토벤 작품은 칠 수 없으리라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왼손만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가 된 라울 소사라는 사람도 있다지 않아요.”


이 기사의 파장은 상당히 컸습니다.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사른 열정이 당시 외환위기에 지쳐있던 많은 이들에게 와닿았던 모양입니다. 제게는 수십 통의 격려전화가 쏟아졌습니다. 희아양은 방송에 잇따라 출연하고,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더 나중에는 CNN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고요. 희아양의 연주회도 잇따라 열려 많은 이들이 희아양의 '희망 바이러스'에 전염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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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갑선씨가 쓴 수기 '신이 준 손가락'


그 해 가을 저희 결혼식 때는 희아양에게 축하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제가 사람 도리를 잘 못하다 보니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TV 등에서 희아양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흐뭇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여직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희아씨 어머니가 저를 언급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걸었던 10년 전 어머니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더군요.    


10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희아씨’는 이전의 앳되고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뚜렷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가진 공인이었습니다. 희아씨는 통일음악회 등에 참여하고, 북녘어린이와 장애인, 탈북자들을 돕는데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치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희아씨는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녀는 김대중 정부 이래로 지속돼온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대치국면으로 전환된 것에 분노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의 지원이 끊겨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물론 북한 정부당국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북한만 ‘우리나라엔 장애인이 한 명도 없다’며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며 장애인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북한 당국을 성토하더군요. 그녀는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이명박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이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며 “자라날 아이들이 이런 대통령을 보면서 어떤 영향을 받을 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희아씨는 또 “현 정부 들어와서는 부유한 사람들만 더 잘 살고, 서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매우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모전여전일까요? 사실 희아씨의 그런 생각과 태도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현 정부가 장애인들에게 가던 보조혜택을 많이 줄이려 한다”며 “정부는 부정수급자가 많아서 이를 없애려 한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라면 제도를 없앨 게 아니라 부정수급자를 제대로 가려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흉측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저보다 더 비판적인 것 같아 “이제 희아씨도 유명인인데 그런 말해도 괜찮느냐?”고 물으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눈치를 봐야 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채 하면 그 나쁜 짓에 동조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지도층 중에는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적인 태도는 오히려 개신교 스스로에게도 안 좋은 것 같다”며 “하나님의 참뜻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희아씨가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는데,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날 대화가 딱딱한 내용으로만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요. 희아씨는 각종 연주회 요청이 국내외에서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대부분 자선연주회라고 합니다. 당장 이달 말에 미국과 캐나다 연주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습니다. 북미지역 장애인들을 위한 자선공연이라고 하는군요. 이미 7월에는 중국 쓰촨성 지진 성금 모금을 위해 중국 충칭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요. 지난 9월1일에도 북측 장애인돕기 자선 음악회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가졌다고 하더군요. 9월 26일에는 마산MBC홀에서 경남통일농업협력회의(경통협)의 ‘북녘어린이 콩우유 지원사업’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1000원이면 북한 어린이 한 명에게 일주일 동안 콩우유를 지원해 줄 수 있다”며 “매월 1000원을 내는 회원 10만명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경통협 사무실 055-585-7421~2번으로 전화해서 자세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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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앨범의 CD표지


자리를 정리할 무렵, 희아씨의 연주곡 CD와 어머니가 쓰신 수기인 '신이 준 손가락' 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CD와 책 판매 수익금은 북한 장애인을 위한 항생제, 의료기구 지원금으로 기부한다고 하네요.) 희아씨의 친필 사인과 함께 말이죠. 저도 제가 번역한 책을 답례로 드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CD를 들었습니다.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량이었습니다. 희아씨는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으로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희아씨 홈페이지(www.heeah.com)에 올려져 있는 ‘즉흥환상곡’을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으면 네 손가락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는 걸까요? 희아씨의 연주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희아씨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웠고 세상을 향해 밝은 웃음을 활짝 웃게 해준 피아노! 그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을 다시,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과 친구 여러분들께 돌려드립니다.” 희아씨가 있어서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 같습니다. 

by 선대인 2008. 9. 11. 08:45

경찰이 YTN 정문 앞에 전경버스 4대를 배치하는 가운데 YTN노조가 파업 찬반 투표 결과를 오늘(9월 10일) 오후 발표하기로 함에 따라 YTN사태가 더욱 긴박해지고 있다.

경찰은 또 YTN 사측이 노종면 노조위원장 등 노조원 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함에 따라 김기용 남대문서장이 직접 나와 현장 조사를 벌였으나, 노조의 강력한 항의로 돌아갔다.

YTN노조는 “현직 경찰서장이 단순 고소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바로 다음날 기다렸다는 듯이 현장에 나타나 위력 시위를 하는 것은 노조에 대한 정권 차원의 협박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YTN 내부에서는 사태의 해법에 관한 선후배 기자간 논쟁이 벌어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노조에 의해 ‘불량간부’로 찍혔다는 한 국장급 간부가 ‘조건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데 대해 통일외교전문기자인 왕선택기자가 이를 조목조목 비판한 것. 아래에 두 사람의 글을 순서대로 게재했다. 왕기자의 글은 분량 관계상 내용을 줄여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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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정문 앞에 걸려 있는 YTN 노조 지지 플래카드

<<이제 조건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노조로부터 불량간부로 지목된 ...국의 김0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후배들인 노조원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이제 구본홍사장 퇴진운동을 조건없이 접고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노사모두가 패자가 되는 파국의 검은 그림자가 점차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파국을 막는 방안이라고 믿습니다. 노조가 사측이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원치 않는 공권력의 개입을 부를 것이 뻔합니다. 이에 대해 노조는 파업으로 맞설 수 있겠지요. 그 순간 한국의 CNN을 꿈꾸며 우리모두의 피와 땀이 배인 YTN의 경쟁력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매출 감소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결과가 올 것이며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저는 다음 네 가지 이유로 노조가 구사장 퇴진 운동을 조건 없이 접고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호소합니다.

첫째, 노조의 구사장 퇴진운동이 80년대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저항권의 발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조는 인사철회와 구사장의 퇴진만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는 노조의 주장이 상당한 명분과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코스닥상장업체에서 정식 절차를 거쳐 선임된 사장의 퇴진을 도를 넘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현행 법률과 사규에 비추어 불법입니다. 설사 사장 선임절차를 규정한 법률과 규정이 불비하고 소속원의 의지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노조는 구사장 퇴진 요구가 절대선인 양 주장하며 공공연하게 공권력투입과 사법처리를 감수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부 노조원에게서는 투사가 된 듯한 광기를 느낍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주장이 설득력과 정당성을 담보하려면 공정방송을 기치로 내건 구본홍사장 퇴진운동이 저항권 행사 차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조의 주장과 행동은 과거 군부독재시대때 저항권 차원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공정방송을 얘기하면서 정치권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격려방문이 있었습니다. 이미 상당수 후배노조원들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구본홍사장 퇴진운동은 공정방송을 볼모로 한 정치투쟁으로 변모됐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설령 노조의 힘이 강해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관행을 정당화함으로써 두고두고 YTN의 역사에 오욕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노조원들이 훗날 데스크도 되고 그중에서 경영진도 나올 것입니다. 그때 지금과 똑같이 후배들이 정치적 이슈를 내세워 몰아 부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 후배에게 당하는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입니다.

 셋째, 형식적인 명분을 내세운 노조의 극한투쟁이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조원들의 최근 행동을 보면서 과거 경인방송 iTV 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몇 년전 iTV 노조는 당시 사주가 증자 등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허가당국인 당시 방송위원회에 방송국 재허가를 내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방송위원들은 보란듯이 재허가를 거부함으로써 회사가 문을 닫고야 말았습니다. 종사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이후 당시 노조집행부가 노조원들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졌겠습니까? YTN도 지금 내년 3월 재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달 중으로 관련서류를 제출해야합니다. 또한 소유구조를 공적구조에서 사적구조로 바꾸는 민영화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막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노사가 분열해서 딴 소리를 낸다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넷째, ‘코드인사는 괜찮고 캠프인사는 안 된다.’는 노조의 주장은 YTN구성원들을 스스로 모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업소유구조로 돼 있는 YTN은 과거에 정권과 가까운 인사가 사장이 안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임 표완수 사장이 노무현 정권과 전혀 무관한 인사였습니까? 아니면 백인호 사장이 김대중 정권과 전혀 무관한 인사였습니까? 이들이 당시 정권과는 전혀 무관한 어디서 독립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다 온 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표완수사장 시절과 그 이전 사장시절에 우리가 정권의 앞잡이 노력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도국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공정방송에 대한 의지와 공정방송위원회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는 공정방송의 관행을 정립해 왔습니다. 저는 구본홍사장이 현 대통령의 캠프에 참여한 캠프인사이긴 하지만 과거의 코드인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YTN구성원들의 불같은 의지와 공정방송제도의 정비로 우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정보도를 할 수 있습니다.

후배 노조원 여러분!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조건없이 구본홍사장 퇴진운동을 접고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얼마 전까지 선후배가 이마를 맞대고 기사 한줄 한줄을 가지고 씨름하며, 특종을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치열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던 선후배의 위치로 돌아갑시다. 결코 노조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후퇴는 대기업 노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퇴로없는 노사간 협상을 하다 난파 직전에 통 큰 양보를 함으로써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례는 노동운동사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벌여온 투쟁의 참의미는 조금도 가감없이 YTN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년 전 보도국장추천제를 개선하자며 공개적인 글을 올린 이후 다시는 논란에 휩싸이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을 매우 망설였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주장도 경청하는 아량을 가져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김 선배께>>

 김 선배께서 고심 끝에 올리신 글 읽으면서 참담한 마음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역지사지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중간 생략) 게시글에서 김 선배께서는 노조가 사장 퇴진 운동을 접어야 한다고 하시고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드셨습니다.

첫째 이유는 이번 투쟁의 성격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노조의 투쟁이 80년대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민주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을 중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노조는 현재 공정방송 사수를 위해 구본홍 사장 선임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데 이 같은 우리 노조의 투쟁은 생존권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공정성은 YTN이 창립 15년만에 대한민국 주요 언론으로 급성장하는 기적적 발전의 기반이 됐고 따라서 다른 언론사와 비교할 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장점이 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현 대통령의 특보를 지냈던 분이 YTN의 사장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한민국 언론시장에서 우리 회사의 최대 강점인 공정성을 심대하게 훼손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언론의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가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고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 기관이 정책이나 정치를 잘못한다고 판단되면 불가피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는데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보도를 보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은 산을 산이라 하고 물을 물이라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명백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정성으로 성공한 회사가 공정성 이미지를 훼손당한다면 회사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회사 발전의 근간인 공정성을 잃는다면 한국 사회에서 YTN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언론사로서 자긍심은 뿌리째 뽑힐 것이고 회사의 수입도 줄어들게 될 것이며 결국 1,2년 안에 다른 조그만 케이블 TV채널과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언론사의 상품은 보도입니다. 보도가 형편없으면 그 상품은 팔릴 수 없습니다. 야구를 못하는 프로야구팀은 관중의 외면을 받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언론은 야구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야구팀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노조 투쟁의 성격은 언론 기업으로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응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성에 대해서도 일부 말씀이 있으셨지만 언론사로서 공정방송에 위해가 되는 상황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불의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언론인의 자격을 잃는 것이며 자격이 없는 언론인이 다니는 언론사를 우리는 사이비 언론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사회의 공적인 사이비 언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법성 논란과 불의에 대한 저항이 충돌할 때 언론인이라면 불가피하게 약간의 불법적 요소를 감수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불의에 대한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노조 집회에 참석한 사실을 두고 정치 투쟁의 성격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민주당 의원들이 집회에 참석하겠다는 것을 노조 지도부가 거부했고 행사가 끝난 뒤 집행부와 면담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들었습니다.

둘째, 노조가 승리한다고 해도 오욕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심각한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느낍니다. 노조가 원하는 승리에 대해 오해하시고 있다는 점을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노조의 승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공정방송 수호입니다. 공정방송의 틀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노조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공정방송을 지켜내고 발전시키는 것이 역사적으로 오욕이 될 것으로 여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노조의 승리는 공정 방송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의 승리가 됩니다. YTN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가 공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노조의 투쟁 목표는 바로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이 들어오는 것을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그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우리가 공정방송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YTN 노조는 공정방송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미 승리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는 노조의 주장에 상당한 명분이 있다고 김 선배도 인정하셨습니다. 명분이 명확하게 드러났으면 그에 따라 처신하면 될 일입니다. 명분은 인정할 수 있지만 현실이 다르게 전개되니 현실을 따르자는 말씀은 언론인으로서 하실 말씀이 아닌 듯합니다. 훗날 노조원들 가운데 선배들이 후배들로부터 같은 방식으로 당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셨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은 선배들이 후배들로부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상황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YTN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가운데 언론인의 책무를 교육하셨던 선배들이 오히려 진실을 외면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후배들을 막기 위해 용역깡패를 동원하는 상상 밖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배가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하고 후배들이 그에 대해 비난한다면 그것은 후배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 선배가 먼저 반성해야 마땅한 상황이 됩니다. 15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판단하기 어려운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번 일은 대단히 명백합니다. 대통령 특보 출신의 사장이 들어오면 우리의 공정방송틀은 심각하게 훼손되며 이는 반드시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셋째, 경인 방송의 사례와 비교를 하셨는데 이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경인 방송 노조는 명분과 실리 면에서 매우 어리석은 전략을 택했고 투쟁 초기 단계에서부터 논란이 됐었습니다. 공정방송 수호를 위해 투쟁중인 YTN 노조를 예전의 경인방송 노조와 비교하시는 것은 정말로 지나치시다는 말씀 이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넷째, 과거 노무현 행정부나 김대중 행정부에도 코드 인사가 있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캠프 인사와 다를 바 없다면서 노조가 과잉반응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견 일리가 있고 이 부분에 대해 노조 집행부가 유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코드 인사와 캠프 인사는 내용적으로 볼 때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일반 시청자 대중이 참고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특보 출신 인사는 너무나도 명백한 편향성의 근거가 되며 그런 분이 언론사 사장으로 들어오면 누구라도 그 언론사의 보도 공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드 인사나 캠프 인사가 다를 게 없다고 하시는 것은 마치 누런색 사자나 누런색 노루나 색깔이 같으니 서로 다를 게 없다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순백색의 아름다운 색깔을 원하지만 우리가 처한 조건으로 보면 누런색 정도의 흠결은 우리가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색깔이 같다고 노루나 사자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루를 울타리 안에 들여놓으면 배추밭을 망치는 정도로 그치지만 사자를 울타리 안에 들여놓으면 집식구들을 모두 잡아먹게 됩니다. 공정방송 제도화로 공정방송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은 저의 소신과 일치하는 부분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공정방송은 말로만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엄격한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거듭 강조드리고자 합니다. 더구나 사장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직 사나운 맹수인 사자인지 아니면 평화적인 노루인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사자인지 노루인지 증명을 하시는 것은 사장으로 오실 분이 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지난 몇 주 동안 벌어진 일을 돌이켜 보면 회사 젊은 직원들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선량한 보통 직원들을 투사로 변모시키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잘못된 정책을 잇따라 감행함으로써 노조의 투쟁을 가열시키는 상황을 보면서 노루가 아니라 사자일 것이라는 심증에 무게가 쏠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투쟁하는 것이고 그것도 생존권 차원의 투쟁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10년전 노조 창립을 위해 밤을 새워 일했던 성실한 노조원이었고 YTN 공채 1기 사원이라는 명예와 책임감을 자랑스러워하는 젊은이였지만 이제는 45세를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고 언론인 경력도 벌써 15년을 채워가는 기자가 됐습니다. 저도 세상 일이 복잡하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후배 기자들이 원하는 순결한 세상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합니다. 매우 부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에 저항하지 않으면 언론인으로서 자격이 없어지게 되고 우리가 저항하지 않으면 YTN은 그저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사이비 언론사가 됩니다. 그런 상황을 방치할 수 없어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하략)

 

by 선대인 2008. 9. 1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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