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MIT 슬로안 경영대학원에서 개설되는 수업 중에 ‘시스템 역학(system dynamics)'이라는 수업이 있다. 이 수업에서는 초기에 학생들이 조를 짜서 ‘맥주 유통 게임(Beer Distribution Game)’을 해보게 한다. 필자도 이 수업을 들을 때 실제로 게임에 참여해 보았다. 이 게임은 공급 과정에서 일어나는 시간 지연(time delay)이 생산공장과 유통업자, 도매상, 소매상, 소비자를 거치면서 연쇄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지를 간접 체험해보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각각 소비자와 소매상 등 한 가지 역할을 맡는다. 소비자가 주문을 내면 이에 반응해 소매상--->도매상--->유통업자--->공장으로 이어지며 주문을 내게 된다. 각 단계에서 학생들은 재고를 갖게 되면 한 상자당 0.5달러, 주문 적체(마이너스 재고)가 생기면 한 상자당 1달러의 손실을 보게 된다고 가정한다. 즉, 재고를 최대한 0에 가깝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소비자는 처음 몇 주 동안 4 상자를 주문하다가 이후 8상자로 올려 주문한 다음에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소매상, 도매상, 유통업자, 공장 등에서는 소비자 주문이 8상자로 오른 다음에는 주문이 들쭉날쭉 해진다. 소비자 주문은 8상자로 올라선 뒤 일관됐는데도 각 공급 단계의 반응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또 각 단계별 재고는 +에서 -로 진폭이 생겨나고, 약 20~25주에 걸친 사이클도 생겨난다. 특히 소비자 주문 증가에 대응한 공장의 생산량 증가는 약 15주 후에 절정에 이르렀고, 생산증가량은 주문 증가량의 약 4배였다. 각 단계의 행위자들은 재고량을 최대한 0에 가깝게 만들려 하지만 실제 재고는 크게 넘치거나 모자라는 주기를 되풀이했다. 이 같은 반응은 이 게임이 되풀이 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같았다. 현실의 복잡한 공급 과정에 비해서는 훨씬 단순화된 시뮬레이션인데도 이 같은 진폭과 불안정성이 나타났다. 공장의 기계 고장부터 시작해서 수송 사고, 노조 파업, 양산능력의 한계나 예산 제약 같은 것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는 불안정성이 훨씬 증폭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맥주 유통 과정에서만 발생할까? 아니다. 오히려 시장 수요의 시그널에 반응해 시장에 제품이 재빨리 공급되는(즉, 시간 지연이 적은) 공산품은 덜한 편이다. 공급 과정에서 시간 지연이 많이 생기는 주택시장은 이런 진폭 현상이 훨씬 심하고 진폭의 주기도 길다. 주택 시장의 시간 지연으로 인한 집값의 등락 사이클은 세계 각국에서 오랫동안 관찰돼온 일반화된 현상이다. ‘시스템 다이내믹스’ 수업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는 존 D 스털먼(John D. Sterman) 교수의 명저 ‘비즈니스 다이내믹스'에도 부동산 시장의 버블과 버블 붕괴 현상을 아예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스털먼 교수는 “부동산 시장은 가장 불안정한 주기성을 띤 자산 시장 가운데 하나로 약 10~20년에 걸친 증폭 주기를 가진다”고 적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그 같은 주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의 설명을 인용해보자. (시스템 역학에 나오는 용어는 충분한 설명 없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으므로 일부 표현은 필자가 일반적 용어로 대체하거나 생략했다)

“상업 용지 수요는 경제 활동에 좌우된다. 해당 지역 고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공실률은 떨어진다. 공실률이 낮을 때 임대료는 오르기 시작한다. 임대료 상승은 기업들이 직원 일인당 공간을 줄여 적응함으로써 약간의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요 반응의 탄력도는 낮고 반응 시간은 길다. 공급 측면에서는 상승하는 임대료는 기존 자산들의 수익성과 시장 가치를 높인다. 가격이 높고 상승 중일 때 임대료와 운영 수익은 높고 디벨로퍼들도 상당한 자본 이득을 실현할 수 있다. 높은 수익은 새 디벨로퍼들을 끌어들이고, 그 붐에 편승해서 돈을 벌려는 금융적 지원도 부족함이 없다. 많은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들이 시작되고, 이는 개발 중인 건물들의 공급을 늘린다. 오랜 지연 끝에(2~5년) 임대 공간은 늘어나고 공실률은 떨어지며 임대료도 시장 가치를 끌어내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익이 떨어지면 개발 비율도 떨어진다.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 공급의 균형을 잡으려는 음의 순환고리를 만든다.

새로운 개발 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할 때 디벨로퍼들과 투자자들은 수요와 공급의 성장을 전망함으로써 장래 공실률을 예측해야 한다. (중략) 그렇게 했다면 새 개발 프로젝트 착수율은 임대료가 정점에 이르기 훨씬 전에 떨어졌을 것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공실률이 낮고 수익이 높다 해도 수급 균형을 이룰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한다. 하지만 가격이 정점을 지난 후에야 건물 공급은 정점에 이른다. 공급이 넘쳐나고 공실률이 높아지며 임대료가 떨어진 다음에 말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당장’ 수익이 높다고 본다면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한다. 프로젝트를 끝내는데 2~5년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이 공급과정을 계산에 넣지 못하기 때문에 붐일 때는 건물 과다 공급으로 이어지고 거품이 꺼진 뒤에는 건설 투자가 재빨리 살아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난 100년 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윗글을 보면 최근 한국 부동산 시장 상황이 떠오르지 않는가? 한국의 집값 버블 붕괴도 임박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미분양 물량 급증과 잇따르는 입주율 저조가 공급 과잉 신호를 세차게 보내고 있다. 2008년 6월 현재 미분양 주택 수는 전국적으로 약 15만호. 하지만 실제 미분양 물량은 25만여 가구에 이른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더구나 2008년 하반기에 전국 입주 아파트는 수도권 7만7000채를 포함, 모두 25만1000여채나 된다. 이중 상당수가 미분양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2008년 이후 중대형 평형의 집값이 맥을 못 추는 것도 공급시차 측면에서 볼 수 있다. 2001~2003년 집값 폭등기에 중대형 평수 위주로 집값이 오르자 대부분 언론에서는 중대형 평수의 공급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떠들어댔다. 실제로 중대형 평형 공급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중대형이 돈이 된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이 사재기를 한 탓도 컸다. 그러다 보니 건설업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중대형 평형을 지어댔다. 이후 이뤄진 대부분 재개발 재건축과 뉴타운 사업이 중대형 평수 위주로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시정연)이 2007년말 펴낸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한 저가 소형주택 확보방안’에 따르면 중대형 평수 위주의 아파트 비중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었다. 2002년의 경우 연립 및 다세대 주택이 전체 서울지역 주택 건설 비중의 64.6%를 차지했으나, 2006년에는 21.3%로 대폭 줄었다. 반면 아파트 건설 비중은 2002년 32.4%였으나, 2006년에는 76.5%나 됐다.

서울만 그런 게 아니었다. 2003년 이후 지어진 수도권 아파트도 중대형 평형이 대세였다. 이 흐름을 가장 강하게 탔던 경기도 용인이 전국에서 아파트 평균 면적이 가장 큰 도시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대량으로 분양됐던 중대형 평수의 입주물량이 쏟아진 서울 잠실재건축 단지나 용인 등 경부축의 중대형 평형이 죽을 쑤는 것도 이런 수급 측면이 강하다. 이렇게 입주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다 보니 이 지역은 심각한 역전세난까지 겪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주로 서민들이 사는 중소형 평형의 공급은 크게 줄었다. 올해 총선을 전후해 노원구와 도봉구, 강북구 등의 집값이 상승한 것이나 최근에도 강북 중소형 평형을 중심으로 전세난을 겪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5~2007년 3년 동안 강북에서만 5만호가량의 소형 주택이 철거된 반면 신축된 소형 주택은 1만4000여 호에 불과하다. 더욱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약 8만5000가구가 철거될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강북 소형주택의 품귀현상이 소형평형 위주의 집값 상승을 유발했고, 투기 세력이 가세해 집값 상승이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동북 3구의 집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기는 어렵다. 우선 거래량이 올해 강북 지역 투기가 극성을 부렸던 2008년 3, 4월에 비해 3분의 1 아래로 뚝 떨어졌다. 추가 매수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또 뉴타운 지역 주민들의 70~80%가 세입자여서 이 같은 수급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매매 수요의 급증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탕’하고 뜨려고 했던 투기꾼들로서는 오히려 스스로 덫에 걸려든 격이 됐다. 수익을 현실화하려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들 지역의 집값은 추가 매수세가 없자 2008년 7월부터는 아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다만 해당 지역 및 인근 지역의 전월세난은 계속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밀어붙인 뉴타운이 가져온 폐해인 셈이다.

공급과정의 시간 지체로 인한 수급 불균형만이 집값의 거품 형성과 붕괴 사이클을 만드는 요인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경우 그동안 각종 투기적 상황과 정부의 정책 실패, 건설업계와 중앙 정부의 유착, 건설업계의 담합 및 투기에 편승한 분양가 조작, 건설업계의 분양광고를 매개로 한 언론 매체의 선동적 왜곡 보도, 부녀회나 반상회 등 주민들의 집값 담합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투기 현상이나 건설 부패와 담합 등에 의한 집값 상승을 ‘사이비 시장논리’로 정당화함으로써 투기 버블을 확대재생산한 일부 신문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다만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택 수급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제 집값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공급 부족론’을 들고 나오며 이미 10개의 2기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8.21대책’에서 인천 검단과 오산 세교 등 두 개의 신도시를 확대 지정하기까지 했다. 서울시가 이명박 전임시장 시절 지정했던 35개 뉴타운의 주택 공급 물량 30여만호도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말이 35개이지 서울시가 30여년동안 재개발한 물량의 1.5배가 넘는 규모다. 지금도 공급 초과인 상황에서 집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2010년 이후 집값은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정부나 서울시도 부동산 시장 위축 상황을 보며 계획을 수정할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러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공급을 더 확대하라’고 부르짖는 엉터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부동산 시장이 움츠러들면 3~4년 후에는 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다시 폭등한다. 그러니 건축 규제를 최대한 완화해서 계속 공급을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실제로 8.21대책 가운데 추가 신도시 지정이 이 같은 논리에 따라 나왔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그린벨트를 풀어서 주택을 공급하겠다거나 도심 재개발 재건축 활성화를 계속 부르짖는 것도 이런 측면이 있다.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무조건 공급 타령인 셈이다. 향후 공급 위축을 우려해 정말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 뜻이 가상하다. 통폐합 위기에 놓인 국토해양부 산하 토공과 주공을 위한 밥그릇(결국 퇴직 후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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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인 2008. 9. 18. 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