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9월 9일)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와 어머니 우갑선씨를 만났습니다. 약 10년 만의 재회입니다. 점심 약속 장소로 가는데 가슴이 뛰더군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소녀. ‘희아’라고 불렀던 소녀는 이제 23살의 숙녀 ‘희아씨’가 됐습니다. 하지만 동안(童顔)인 희아씨는 10년 전 모습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제가 이희아씨와 무슨 관계냐고요? 하하.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이던 99년 초 희아씨의 사연을 사회면 톱 기사로 소개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결혼 전의 아내가 희아양 얘기를 처음 전해주었습니다.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희아양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했습니다. 처음에 무척 꺼려하던 희아양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몇 차례 통화한 끝에 가까스로 인터뷰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비 내리는 밤길을 달려 서울 강동구에 있던 희아양 집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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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티 없이 맑고 환한 얼굴. 당시 희아양의 첫 느낌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어머님으로부터 희아양의 사연을 듣는데, 가슴이 자꾸 뭉클해졌습니다. 차에 남아있던 아내가 몇 번씩 핸드폰을 울렸지만, 좀처럼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칠 무렵, 희아양이 ‘즉흥환상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아!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 네 손가락만으로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다니! 그것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습니다. 희아네 가족의 땀, 눈물, 애환, 열정, 희망, 애정이 녹아 있는 결정체였습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의 꿈을 이루려는 가열찬 투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인 다음날 출근해 기사를 출고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없어 고심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데스크로부터 몇 번의 재촉을 받고 보낸 기사는 사회면 톱 박스로 큼지막하게 편집됐습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카인즈'에서 찾아본 그 기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은 없다"-네 손가락 소녀피아니스트 이희아양


'네 손가락의 즉흥환상곡.’서울시 교육청과 한국재활재단이 초등학생들의 독후감 모집을 위해 나누어준 책의 이름이다. 태어날 때부터 두 손 다 합쳐 손가락이 4개밖에 없는 열네살 소녀의 스토리. 그러나 피나는 노력 끝에 전국 피아노 연주대회에서 ‘열 손가락’ 유치부 어린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을 차지했다.


오늘도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9년째 건반에 매달려 사는 서울 주몽초등학교의 이희아양(14·6년)얘기를 담은 책(동화작가 고정욱 기록)표제다. 24일 마감된 독후감 모집(2월6일 당선작 시상)에 응모한 어린이만도 무려 2천여명.


“사람의 작은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장애인친구도 함께 살아가야 할 내 친구가 아닌가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독후감을 적어 낸 한 어린이의 소감이다.


희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손가락’이 전부였다. 두 다리도 없다. 선천성 기형으로 막대기처럼 가늘게 붙어 있던 다리도 세살 때 절단했다. 그래서 페달은 특별히 피아노 위쪽에 붙여 허벅지로 조작한다.


67년 대간첩작전에서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된 아버지 이운봉씨(54)와 간호사로 이씨를 돌보던 어머니 우갑선씨(44·산부인과 조산원) 사이에서 태어난 희아. 기형의 원인은 엄마가 임신사실을 모르고 감기약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여섯살이던 91년 희아에게 연필이라도 쥐는 삶을 열어 주려고 시작한 피아노연습. 받아 가르쳐주는 학원도 없어 석달여를 떠돌아 다니다 ‘숲속피아노학원’ 원장 조미경씨(31·여)를 만났다. 조원장은 우씨가 일하던 산부인과에 입원했다가 희아의 사연을 알게 된 것.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과 오후로 나눠 10시간에 이르는 연습이 시작됐다. 그러나 희아가 짚는 건반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더 힘을 줘.” “안돼. 안돼. 그 부분 다시.”

또래 어린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간 뒤에도 희아와 조씨의 1대1교습은 거듭됐다. 몸살로 앓아눕고 네 손끝에 물집이 잡혔다. 네 손가락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화음은 빠른 손놀림으로 쫓아가야 했다. 그렇게 3개월여가 지나자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학교종이 땡땡땡…’을 끝까지 치던 날 온가족은 울어버렸다.


네 손가락 솜씨는 빠르게 발전했다. 1년여 뒤 참가한 전국학생음악연주평가회에서 희아는 와이만의 ‘은파(Silver Wave)’를 연주, 유치부 최우수상을 따냈다.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행진은 계속됐다.


희아는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96년 일본 장애인재활시설인 ‘꿈의 공방’을 방문해 연주하고 97년에는 국내장애인을 위한 독주회를 열어 수익금 1천만원 가량을 장애인단체에 기부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희아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 하지만 지난해의 뇌출혈 후유증으로 요즘 장시간 연습이 힘들다. 그래도 어렵고 어렵다는 베토벤 소나타 24번 ‘열정’을 하루 3,4시간씩 두드리며 꿈을 불태운다.


“아무리 해도 베토벤 작품은 칠 수 없으리라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왼손만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가 된 라울 소사라는 사람도 있다지 않아요.”


이 기사의 파장은 상당히 컸습니다.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사른 열정이 당시 외환위기에 지쳐있던 많은 이들에게 와닿았던 모양입니다. 제게는 수십 통의 격려전화가 쏟아졌습니다. 희아양은 방송에 잇따라 출연하고,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더 나중에는 CNN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고요. 희아양의 연주회도 잇따라 열려 많은 이들이 희아양의 '희망 바이러스'에 전염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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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갑선씨가 쓴 수기 '신이 준 손가락'


그 해 가을 저희 결혼식 때는 희아양에게 축하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제가 사람 도리를 잘 못하다 보니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TV 등에서 희아양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흐뭇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여직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희아씨 어머니가 저를 언급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걸었던 10년 전 어머니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더군요.    


10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희아씨’는 이전의 앳되고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뚜렷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가진 공인이었습니다. 희아씨는 통일음악회 등에 참여하고, 북녘어린이와 장애인, 탈북자들을 돕는데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치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희아씨는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녀는 김대중 정부 이래로 지속돼온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대치국면으로 전환된 것에 분노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의 지원이 끊겨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물론 북한 정부당국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북한만 ‘우리나라엔 장애인이 한 명도 없다’며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며 장애인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북한 당국을 성토하더군요. 그녀는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이명박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이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며 “자라날 아이들이 이런 대통령을 보면서 어떤 영향을 받을 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희아씨는 또 “현 정부 들어와서는 부유한 사람들만 더 잘 살고, 서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매우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모전여전일까요? 사실 희아씨의 그런 생각과 태도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현 정부가 장애인들에게 가던 보조혜택을 많이 줄이려 한다”며 “정부는 부정수급자가 많아서 이를 없애려 한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라면 제도를 없앨 게 아니라 부정수급자를 제대로 가려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흉측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저보다 더 비판적인 것 같아 “이제 희아씨도 유명인인데 그런 말해도 괜찮느냐?”고 물으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눈치를 봐야 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채 하면 그 나쁜 짓에 동조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지도층 중에는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적인 태도는 오히려 개신교 스스로에게도 안 좋은 것 같다”며 “하나님의 참뜻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희아씨가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는데,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날 대화가 딱딱한 내용으로만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요. 희아씨는 각종 연주회 요청이 국내외에서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대부분 자선연주회라고 합니다. 당장 이달 말에 미국과 캐나다 연주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습니다. 북미지역 장애인들을 위한 자선공연이라고 하는군요. 이미 7월에는 중국 쓰촨성 지진 성금 모금을 위해 중국 충칭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요. 지난 9월1일에도 북측 장애인돕기 자선 음악회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가졌다고 하더군요. 9월 26일에는 마산MBC홀에서 경남통일농업협력회의(경통협)의 ‘북녘어린이 콩우유 지원사업’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1000원이면 북한 어린이 한 명에게 일주일 동안 콩우유를 지원해 줄 수 있다”며 “매월 1000원을 내는 회원 10만명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경통협 사무실 055-585-7421~2번으로 전화해서 자세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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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앨범의 CD표지


자리를 정리할 무렵, 희아씨의 연주곡 CD와 어머니가 쓰신 수기인 '신이 준 손가락' 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CD와 책 판매 수익금은 북한 장애인을 위한 항생제, 의료기구 지원금으로 기부한다고 하네요.) 희아씨의 친필 사인과 함께 말이죠. 저도 제가 번역한 책을 답례로 드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CD를 들었습니다.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량이었습니다. 희아씨는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으로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희아씨 홈페이지(www.heeah.com)에 올려져 있는 ‘즉흥환상곡’을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으면 네 손가락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는 걸까요? 희아씨의 연주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희아씨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웠고 세상을 향해 밝은 웃음을 활짝 웃게 해준 피아노! 그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을 다시,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과 친구 여러분들께 돌려드립니다.” 희아씨가 있어서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 같습니다. 

by 선대인 2008. 9. 11. 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