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전직 신문기자였습니다. 그것도 소위 말하는 '족벌언론'의 기자였습니다. 더구나 그 신문에 소속돼 있을 당시뿐만 아니라 신문사에서 나와서도 여러 직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해 족벌 신문사들의 추악한 면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 신문들이 가진 언론으로서의 문제점과 그 신문들이 왜곡보도를 일삼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구조적이고 지속적으로 왜곡 보도와 여론 조작을 일삼는 한국 언론, 특히 찌라시 신문들의 보도 태도와 이 같은 보도가 일어나는 구조적 배경에 대해 한 번 정리해 많은 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은 욕구가 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욕구만 있을 뿐 늘 시간에 쫓기다 보니 쉽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면 영원히 그런 작업을 못하고 말겠다 싶어 지난 주말에 작심하고 펜을 들어봤습니다. 이렇게 틈나는 대로 정리한 글을 부담 갖지 않고 그때그때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언론개혁'란과 다음 아고라 토론방에 연재해볼 생각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대략 6~7회 정도 연재하면 대충 큰 골격은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좀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겠습니다. 연재 주기도 일정하지 않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아랫글은 첫 회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은 아래 링크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3&articleId=50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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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가장 효과적인 검열이 될 수 있다. (The "market" can be a most effective censor.)”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인 로버트 맥체즈니 교수의 책 ‘The Problem of the Media' 225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광고주로서 기업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장 대신 자본이라고 표현하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만.) 위 문장에서 맥체즈니 교수는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의 미디어 정치경제학 전공 교수로 상아탑에만 머무르지 않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통해 미디어 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직접 일리노이주의 지역 시사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신문방송의 교차 소유를 확대하려는 2003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조치에 대한 대중적 반란을 주도한 단체인 ‘Free Press’의 창립자이자 회장입니다.

 

그는 탈규제를 통해 생겨난 거대 독과점 미디어그룹들이 ‘국민에 앞서서 이익(Profit over People)'을 챙기기 위해 사회적 의제를 제한하고, 사실을 조작하며 본질을 왜곡해 민주주의의 기본적 토대인 언론 자유를 극도로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같은 독과점 미디어그룹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미 연방정부가 미디어자본의 압력 아래 미디어그룹들이 최대한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독과점 구조를 만들어준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독과점 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미디어들은 미디어정책에 대한 논의를 독점하고 소수 정치가와 기득권 위주의 미디어 방송을 실현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9.11테러와 이어진 미국의 침략전쟁에 관한 미국 미디어의 보도 태도는 한 마디로 '정치적 선전선동(propaganda)'에 불과했다고 힐난할 정도입니다.

 

글의 첫 머리에 그의 활동과 주장을 소개한 이유는 그가 비판하는 상황이 한국의 미디어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비판하는 미국 사회의 미디어 현실은 주로 방송을 장악한 거대 미디어그룹들에 관한 것이고, 제가 볼 때 미국사회의 언론 자유와 보도의 품질, 그리고 시청자와 독자들의 선택권 및 다양성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상태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그가 비판하는 내용을 한국의 경우 신문들, 특히 기득권 신문들에서 훨씬 더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신문들은 광고주의 압력을 매우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난 번 글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신문사의 수익 구조와 연관해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구독료 수입이나 각종 부대사업과 광고수입이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루고 있는 ‘뉴욕타임스’ 등 선진국 신문과 달리 국내 신문은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각종 경품 등을 통해 구독자를 유치하는 관행에 젖어 있는 국내 신문들의 경우 구독료 수입은 거의 그대로 신문지국 지원 및 ‘확장 비용’ 등으로 나가므로 사실상 100%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신문사 경영이 광고주의 압력에 심각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렇게 광고수입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각 신문들, 특히 기득권 메이저 신문들은 서울 강남의 부동산 부자들을 중심으로 소위 ‘구매력 있는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구매력 있는 독자들이 신문을 봐야 기업이 비싼 단가의 광고를 싣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문사에 있으면서 이 같은 주문들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강남 독자층을 공략해야 하니, 구매력 있는 독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기사를 발굴하라’는 지시는 매우 점잖은 주문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 아침 밥상머리에서 지체장애인 이야기는 보고 싶어하지 않으니 빼’ ‘외국계 명품 브랜드 광고 유치하기 위해 고급 패션과 외국계 화장품 기사를쓰라’는 식의 주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정말 이런 주문들이 무감각해지는 수준까지, 그래서 기자들이 스스로 ‘자기검열’과 ‘동화’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런 기사들을 생산하게 되는 수준까지 가게 됩니다. 재산세 문제나 종부세 문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정부의 투기 억제대책을 ‘강남 때려잡기’라고 비판하는 것도 소위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영합하는 방향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기득권 지향적 보도--->구매력 있는 독자층 확보--->고가 기업광고 유치--->기득권 지향적 보도로 이어지는 왜곡된 순환구조가 국내 기득권 신문들의 보도태도를 오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같은 신문들의 보도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방송과 인터넷 뉴스포털, 무가지 등 경쟁매체들이 상승세를 타는 반면, 이들 신문들의 구독률과 열독률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광고유치에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문제점이 신문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슈가 부동산 문제입니다. 신문들의 영업 이익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동산 광고는 신문사 경영 측면에서는 구세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동산 광고는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한 2001년 이후 학습지 광고, 유통(백화점) 광고 등을 제치고 신문 광고 매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메이저신문에서 부동산 광고의 매출 기여도는 더 높습니다. 메이저신문사들의 경우 지난 6~7년 동안 부동산 광고가 신문사 광고 매출의 35% 전후를 차지해 사실상 부동산 광고가 신문사들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아파트 분양 정보나 가격대 등의 정보는 고지성이나 시의성 측면에서 신문이 가장 적절한 매체로 평가받습니다. 이 때문에 각 신문사들은 부동산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 여름 휴가철 등 비수기를 빼고는 매월 부동산 광고 특집면을 별도로 제작할 정도였습니다. 부동산광고가 신문 광고매출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은 신문들이 부동산 투기 붐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강한 유인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반시장, 반소비자적인 제도로 꼽히는 선분양제 대신 후분양제를 신문들이 달가워할 수 없는 사정도 부동산 광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 신문사의 한 광고국 직원은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건설업체 스스로의 자금력으로 70%이상 시공한 뒤 광고를 할 수 있게 돼 있어 광고 물량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신문사 입장에서는 최대한 도입을 막고 싶은 제도가 후분양제”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한 전직 건설업체 직원의 증언을 통해서도 언론과 건설업체와의 유착구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합니다.

 

“부동산 가격이 전반적으로 올라갈수록 건설업체는 분양가를 높인다. 부동산 값이 뛸수록 분양가를 높이는데도 유리하니 부동산 값을 띄우기 위한 여론 조작도 한다. 고도의 전략인데 업체가 땅을 산 지역에 대해 ‘유망개발정보’ 등의 형식으로 언론, 특히 신문에서 보도되게 한다. 건교부의 중장기 전략을 분석하는 자료를 내고 화성 동탄과 행정수도 부지 등이 터지면 얼마나 오르고 식의 정보를 계속 제공하는 거다. 이렇게 언론과의 유착관계를 만든다. 홍보팀에서 출입기자들을 만나 접대하면서 애로 있다, 도와달라고 호소하거나, 현금을 쥐어주면서 어떤 기사 나갈 때 우리 회사 부각시켜달라 이런 식으로 부탁도 한다. 물론 부탁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접대가 통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특히 대형업체들은 홍보팀을 통해 관련 기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분양가를 산정할 때 광고비를 간접비의 1~2% 정도로 산정한다. 광고비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 특히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는 반드시 광고를 내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안 해도 분양되는데 웬만하면 전면광고한다. 분양 끝난 뒤에도 사례광고를 한다. 메이저 신문은 기본이고 경제신문에도 대부분 광고한다. 언론에는 괜히 밉보이면 안 되니 광고하는 거다. 공사 프로젝트 관련해서 주위 민원도 있고 산업재해도 발생하고 회사 비리도 드러날 수 있으니 급할 때를 대비해 광고를 통해 언론사와 미리 유착 관계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광고 유치뿐만 아니라 언론사의 주택 및 부동산 개발사업 참여, 그리고 다량의 부동산을 보유한 언론사 사주들의 이해관계도 객관적인 보도를 힘들게 하는 요인입니다. 세계일보, 한국일보, 심지어 언필칭 진보언론이라는 경향신문까지 현재 상당수 언론사들이 직접 주택 개발 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들 경우에는 “조선일보가 정말 떼돈 버는 방법은 방송 참여가 아니라 코리아나 호텔과 주변 조선일보 건물들을 한데 묶어 용도를 변경한 뒤 거대한 주상복합단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 뿐인가요? 상암DMC의 첨담 업무 용지의 경우 땅값에서만 몇 배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각 언론사의 치열한 로비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그 업무용지를 분양받기 전 상암DMC사업과 그 사업을 벌이는 서울시를 거의 ‘찬양’하는 수준의 기사를 잇따라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과정을 거쳐서 족벌 언론사들은 대부분 상암DMC의 노른자위 땅을 분양받았습니다. 왜 청계천 사업으로 자사 사옥의 부동산 가치가 껑충 뛴 일부 신문들이 대선 전 ‘청계천찬가’와 ‘이명박 찬가’를 그토록 열심히 불러댔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 이처럼 강한 이해관계를 가진 언론사들이 객관적으로 보도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족벌 언론사들의 사주들은 모두 엄청난 ‘부동산 재벌’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 종부세가 오르면 언론사주들의 부담은 매우 커집니다. 이들 언론사주들이 보유한 부동산 가액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일일이 소개하기는 어려우나 그 일단이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세무조사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부 초년병 시절 수도권을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지방 주재 선배가 사주집안의 부동산과 관련된 민원들을 처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뺏기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소위 기득권 신문들의 종부세 비판 기사들은 고가 부동산 소유주인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영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지금은 미분양과 미입주 물량이 엄청나게 쌓이고 있지만, 언론사들은 몇 년전까지 ‘공급 부족론’이라는 건설업체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며 건설물량 확대를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또 집값 거품을 더 커지기 전에 꺼뜨려야 할 시기에도 정부에 끊임없이 각종 주택 사업 및 은행 대출 관련 규제완화를 주장해 집값 거품을 키우는 데 일조해왔습니다. 집값 하락세가 완연해지고 있는 2008년 상반기 이후에도 이런 식의 보도는 약간의 변화를 거쳐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집값 거품이 붕괴하면 서민들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이유로 사실상의 집값 부양을 요구한다거나 집값 하락 소식을 전하면서도 집값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의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식입니다. 또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주택 공급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장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가면 2~3년 후 공급이 줄어 집값이 폭등한다”며 정부가 나서서라도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같은 주장이 공급 과잉 해소를 지연시켜 오히려 부동산 시장의 침체를 장기화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발 등의 불 끄기에 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 기득권 언론들은 건설업체들을 살려야 한국경제가 산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대 건설업체들이 살아야 (광고수입이 늘어나) 자신들이 산다고는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많은 신문들은 줄기차게 ‘집을 사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리면 내리는 대로 집을 사라는 식으로 유도하는 기사를 자주 냅니다. 물론 부동산 재테크 전문가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공생관계가 형성돼 있는 셈입니다. 또 광고주인 건설사들을 위해 ‘잘 고르면 알짜배기’라는 식의 미분양 물량 해소에 도움 되는 기사를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직 쓸 말은 많지만 글이 길어지니 이 정도에서 줄일까 합니다. 이번 주제는 다음 글에서 제 개인적인 경험들을 중심으로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이번 글을 마무리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의 언론들, 특히 일부 기득권 신문들은 절대 사회적 공기(公器)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고비마다 일반 국민들의 이익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측면이 너무 강합니다. 앞서 소개한 맥체즈니 교수 등 세 명의 미디어학자가 편집한 ‘The Future of Media'라는 책의 서문을 쓴 빌 모이어스의 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까 합니다.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특수 이익집단이 법을 무시하고 일반대중들의 복지를 훼손하면 사회적으로 부채가 생겨난다. 그런데 그 부채는 우리 모두가 지불해야 하는 부채다. 그리고 그 부채의 총합은 바로 우리의 시민권적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중략) 이런 거대 미디어 기업집단들(conglomerates)이 우리가 보고, 읽고, 듣는 것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거대 사업체로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정치적 과정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포함해서-을 증대하기 위해 매체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좀처럼 보도하지 않는다. (중략) 상업적인 표현(commercial speech)만이 유일하게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려서는 안 된다”

 

 

더 많은 토론과 정보 공유를 원하시는 분들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을 방문해 주십시오.


by 선대인 2009. 1. 14. 04:14

최근 버블 세븐 지역을 중심으로 수도권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는 가운데 주택 선분양제의 문제점과 폐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제도인 선분양제는 건설 및 부동산 경기의 진폭을 키운다. 투기적 분양과 미분양 물량 증가로 인한 건설업계의 극단적인 부침, 분양자의 금융부담 증가 등의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선분양제는 부동산 붐이 일 때는 차익을 노린 주택 투기를 조장하는 반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 자산 가치 폭락에 의한 가계의 경제적 피해를 키우고 입주 지연과 역전세난을 초래하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이 같은 문제들이 금융권의 문제로까지 이어져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경제적 충격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처럼 큰 문제점과 폐해를 낳는 선분양 제도의 도입 배경과 존속과정을 먼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주택 선분양 제도는 1977년 아파트 분양가규제가 도입됨에 따라 주택건설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될 것으로 판단한 정책당국이 주택건설업체들의 금융비용을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도입한 제도다. 주택건설업체들이 제도권 금융에 이자를 물지 않고 주택 수요자로부터 주택건설자금을 무이자로 직접 조달해 주택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선분양제는 당시 민간 주택건설업체들이 모도 영세하고 자금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급속한 도시화와 수도권 인구유입 가속화에 따른 주택공급 부족을 비교적 단기간에 해소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선분양제는 시장가격 이하로 책정된 분양가와 실제 시장거래가격 간의 차익을 노리는 투기적 수요를 유발시켰으며 공급자 우위 시장을 고착화 시켰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 또한 적지 않았다. 반복적인 부동산 투기 파동과 경기 침체기에 미분양 증가에 따른 주택 구입자 피해가 두드러지자 그 부정적 측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때문에 이미 1995년 선분양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감사원의 권고에 따라 정부가 1997년부터 시장원리에 맞게 후분양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택건설업계는 시장원리에 입각해 후분양제를 시행하려면 먼저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분양가 규제도 함께 자율화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엉뚱하게 치달았다. 건설업계의 분양가 자율화 요구는 즉각 받아들이면서도 외환위기 직후 고사 위기에 처한 건설업계를 살린다는 명목으로분양제 도입은 뒤로 미뤄졌다. 공급자에게 유리한 선분양제 하에서 분양가마저 자율화돼 오히려 공급자인 건설업체들의 힘만 일방적으로 잔뜩 키워준 결과를 낳은 것이다.

 

2003년초 무현 정권 인수위 시절 후분양제 도입 방침이 결정됐으나, 당시 건설교통부 등의 미온적 태도로 후분양제 도입은 지지부진해지고 선분양제가 여전히 대세를 이뤘다. 한국 주택시장은 선분양제 아래 분양가 자율화라는 공급자를 위해서는 최선이지만 소비자를 위해서는 최악의 제도가 자리잡게 것이다. 그로 인해 2000 부동산 거품이 빠른 속도로 커지게 주요 원인 하나가 됐다고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선분양제 하에서 주택사업의 진행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살펴보자.

시행사는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택지를 분양 받거나 매입한 뒤 해당 택지에서 사업할 시공사와 공사도급 계약을 맺고 주택건설사업을 총괄 진행한다. 시행사가 개발업자인 경우에는 개인 전주(錢主)들로부터 돈을 빌려 택지를 매입하기도 한다. 또 주택 건설업체들 가운데는 직접 시행사 역할까지 맡는 경우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시행사와 시공사가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재개발 재건축 사업의 경우에는 해당 사업지의 조합이 시행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시행사보다 규모가 큰 시공사가 신용보증을 서서 금융기관이 시행사에 택지 매입비 등 초기 사업자금을 대주게 하는 한편 시공사 자신도 직접 자금을 대출받아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행사와 시공사에 대출해준 금융기관은 분양이 이뤄진 뒤 해당 주택사업의 분양계약자들이 내는 중도금 및 잔금을 대출해주고 수익을 올린다. 분양계약자 입장에서는 분양 계약금을 낸 뒤 자신의 돈이나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으로 중도금과 잔금을 치르고 아파트가 완공되면 입주하는 것이다. 이상이 선분양제 하의 주택건설 사업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음에, 선분양제의 폐해와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선분양제는 주택가격의 등락폭과 부동산 경기의 진폭을 키운다고 할 수 있다. 주택 가격이 오르면 건설업체들은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사업을 서둘러 주택 분양을 크게 늘린다. 주택가격이 오르는 추세에서는 손쉽게 분양할 수 있고 선분양 대금으로 큰 부담 없이 주택사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선분양제 하에서 주택 수요자는 약간의 초기 계약금만 있으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살 수 있으므로 분양권 전매차익(분양권 전매 허용시)이나 입주 후 매매차익을 기대하고 자신의 예산한도를 넘어서서 무리한 청약에 나서게 된다. 그 결과 초과 수요에 의한 청약 과열→주택건설업체의 고분양가 분양→주변 집값 상승으로 이어져 집값 상승폭을 키우는 주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동산 거품이 꺼져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없어 수요가 급격히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건설사들이 무리한 선분양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미분양만 급증하면서 가뜩이나 침체에 빠지는 부동산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게 된다.

 

둘째, 선분양제는 분양에서 완공에 이르기까지 긴 시차로 인해 부동산 시장의 구조적 수급 미스매칭을 유발한다. 선분양제 하에서는 아파트 분양 시점에서 입주 시점까지 최소한 3년 정도의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업기획 및 토지 매입 기간까지 포함하면 입주시점까지 4~5년 정도 걸리는 것은 보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차는 근본적으로 부동산 경기의 진폭을 키우는 속성을 갖고 있다. 부동산 붐이 일 때는 주택건설업체들이 수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실제 수요 이상으로 건설 물량을 늘리고, 부동산 붐이 꺼지면 수익성이 떨어지므로 사업을 줄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차가 있기 때문에 주택건설업체들은 주택 경기가 정점을 지난 뒤까지도 주택을 공급하게 된다. 거꾸로 주택 경기가 바닥을 친 뒤 회복할 때에도 주택건설업체들은 뒤늦게 이를 인식하고 그때서야 주택 공급을 계획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셋째, 선분양제는 주택 수급 불균형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시킨다. 이는 선분양제와 후분양제 하에서 주택건설업체가 하는 사업 판단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선분양제 하에서 건설업체는 금융비용의 상당 부분을 분양계약자에게 전가할 수 있으므로 자신들의 예산제약을 넘어 무리한 사업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후분양제였다면 매년 평균 2개의 주택사업을 벌일 주택업체가 선분양제에서는 3개 이상의 사업을 벌이게 되는 식이다. 또한 3년 후 분양시점이 아니라 바로 당장의 분양률만 높이면 되므로 상대적으로 근시안적인 사업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결과 부동산 거품기에 분양된 주택은 부동산 침체기에 입주가 시작돼 가뜩이나 가라앉는 주택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내게 된다. 지금 서울 잠실이나 과천, 용인, 분당 등 수도권 전역에서 쏟아지고 있는 물량 폭탄들이 집값 하락세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부동산 시장 침체의 골이 깊어져 주택건설업체들이 긴축 경영을 통해 분양 물량을 대폭 줄이다 보면 정작 몇 년 후 부동산 시장이 살아날 때에는 입주물량 부족으로 주택경기를 더욱 가열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반면 후분양제 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건설업체의 자체 자금이 많이 들어가야 하고, 3 입주시점에 분양에 성공할 있을지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 사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주택건설사업에 돈을 대주는 금융기관 역시 3 입주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분양될 있는지를 따져야 하므로 좀더 냉철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성을 따져 대출을 하게 된다. 또 주택건설업체는 가능하다면 주택경기 침체기에 저렴한 비용을 들여 사업을 시작해 부동산 활황기에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완공 분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경우 주택건설업계 전체로는 자연스럽게 경기 침체기 때에 주택건설사업을 시작해 경기 활성화 효과를 있게 되며 경기 활황기에 완공주택 증가로 주택가격 급등을 제어하는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선분양제보다는 상대적으로 주택 수급의 진폭을 줄일 있는 것이다.  

 

넷째, 최근 부동산 가격 하락폭이 커지면서 각종 분양사고가 잇따르고 있고, 입주대란과 역전세난으로 많은 가계가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선분양제 탓이 크다. 선분양제 하에서 주택 수요자들은 완성된 주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한까지 입주할 있는 분양권을 청약해 사게 된다. 그런데 완공 전에 부동산 경기의 갑작스러운 냉각으로 주택건설회사가 부도를 낼 경우 피해의 상당 부분을 분양 계약자가 떠안아야 한다. 물론 공기업인 대한주택보증을 통해 건설사의 부도나 파산 등에 의해 생겨나는 분양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분양을 보증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입주 지연으로 인한 금전적, 정신적 피해 주택 수요자의 피해는 상당 부분 불가피하다.

 

실제로 주택건설회사 등의 부도나 자금난 등으로 인한 주택 보증사고는 최근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지난 하반기 이후 주택분양 보증사고[1] 세대수와 주택분양 보증사고 금액이 급증하고 . 최근 3개월 사이에 보증사고가 세대 수만 7,000 가구에 사고금액은 15,877억 원에 이르고 있어 들어 11월까지 발생한 보증사고 세대수의 80%와 사고금액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분양보증 사고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한주택보증에 따르면, 아파트건설 공정이 당초 계획에 비해 15% 이상 늦어진 현장이 지난해 11 53 6,866가구에서 올해는 85 23,168가구로 늘었다. 특히 공정이 20~25%가량 지연돼 분양보증 사고 대상이 되기 직전의 사업장은 지난해 11 21 3,656가구에서 올해 55 13,095가구로 3배 이상 늘었다. 이것은 앞으로 분양 계약자들의 피해가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다섯째, 선분양제 아래서는 주택 소비자들이 완공 입주 전에 갑작스러운 집값 하락으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후분양제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있다. 선분양제에서 주택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소액인 계약금만 있으면 주택을 청약할 수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후분양제에 비해 자신의 예산제약 범위를 벗어나 무리한 주택청약을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아파트 분양만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몇 억원의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시기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주택 청약시장에 무리하게 뛰어들었다. 그 결과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판교신도시 등 수도권의 웬만한 주택단지에는 청약 경쟁률이 수백~수천 대 1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투기적 가수요가 생겨났다. 부동산 거품에 취해 분양 시점이 아닌 3년 후 입주 시점의 집값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보다는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소득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분양계약자들이 아파트 입주하기도 전에 중도금과 잔금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금융권에 수억 원의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실제로 MBC <PD수첩>팀이 지난해 11월에 방영한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조사한 내용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PD수첩>팀이 무작위로 샘플링한 경기도 용인지역의 한 아파트 단지 200가구의 평균 대출액은 34,600만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200가구 가운데 금융권 대출을 갖고 있는 세대는 전체 세대의 81.5%163가구였고, 대출이 없는 집은 37세대(18.5%)에 불과했다. 대출이 2억원 이하인 경우는 28세대, 2억원~3억원인 경우는 29세대, 3억원~5억원인 경우는 58세대였고, 5억원 이상인 경우도 58세대나 됐다. 물론 용인의 경우 부동산 투기 붐이 극에 달했을 때 대규모 분양이 이뤄졌으므로 정도가 심한 편이라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가계가 감당하기 어려운 과다 차입을 통한 가계의 부동산 투기는 용인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잔뜩 빚을 진 가계들이 지금처럼 주택가격이 급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세차익은커녕 극심한 자산가치 하락과 함께 감당하기 힘든 부채만 떠안게 된다. 특히 기존에 보유한 주택의 가격이 뛰면서 이를 담보로 수도권 등지에 추가로 아파트를 분양 받은 사람들은 양쪽 집의 가격이 동시에 하락하고 대출이자 부담은 크게 늘어 개인파산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만일 판교신도시 주택을 완공시점에 맞춰 후분양제로 청약했다면 2~3년 전과 같은 엄청난 고분양가에 청약할 주택 수요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결국 주택건설사들은 고분양가로 상당한 폭리를 취한 뒤 주택 수요자들만 부동산버블 붕괴로 자산가치 급감이라는 위험 부담을 떠안게 된 셈이다.  

 

서울과 수도권 곳곳의 신규 아파트 단지에서 소위 입주 대란과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시세차익을 노리고 아파트를 청약한 계약자는 집값은 떨어지고 은행 빚은 감당하기 어려워 손해를 보더라도 입주 예정인 아파트를 팔아 은행대출을 상환하려 할 것이다. 또 기존 주택을 팔아 넓은 평수 아파트로 옮겨가려 했던 실거주 목적의 계약자들도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인해 기존 주택가격이 크게 떨어져 신규 아파트 중도금과 잔금을 치를 수 없어 입주할 엄두를 내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계약자들이 선택하는 대안은 신규 분양 아파트를 전세로 돌려 최대한 금전적 손실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의 계약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최근 송파구 잠실 재건축 아파트 단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세값까지 급락하며 역전세난까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후분양제였다면 이처럼 극심한 입주대란과 역전세난은 발생하기 힘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분양제가 주택 공급자에게 유리하고 주택 소비자에게 불리한 제도라고 해서 주택 공급자인 건설업체들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선분양제는 부동산 경기 호황기에 주택건설업체가 무리한 주택사업을 하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주택건설업체들은 떴다방이든 무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부동산 투기 붐을 일으켜 주택 청약자들을 희생양 삼아 분양에만 성공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3년 후 입주 시점의 주택경기에 대한 판단은 거의 하지 않고 사업을 진행한다. 이런 과욕과 무리한 사업판단으로 택지를 매입해 분양을 시도하다가 부동산 경기가 죽자 미분양 물량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국토부가 집계한 올해 9월 기준 미분양 157,241가구 가운데 404,36가구가 준공 후 미분양 물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만일 후분양제였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미분양 물량이 최소한 117,000여 가구에 달한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 등 후분양제를 시행하는 대다수 국가에서 주택건설 경기가 위축된다고 해서 한국처럼 막대한 미분양 물량이 쌓이는 경우는 없다.

 

건설사들의 유동성 위기도 미분양 물량이 급증하면서 돈이 묶인 탓이 크다. 또한 2006년 이후 과도한 PF사업 확대로 건설사뿐만 아니라 제 2금융권을 중심으로 금융권 전반의 부실화 우려를 높이고 있는 것도 바로 급증한 미분양 물량 탓이 크다. 나아가 한국 경제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는 가계의 부동산담보 대출과 PF사업 대출, 건설/부동산업 대출을 증폭시키는데도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하자. 한국 부동산시장의 구조적 문제점이 전적으로 선분양제 때문에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분양제가 부동산시장의 위기를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선분양제의 경제적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것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업계의 반대와 이를 비호하는 정부와 정치권, 관변학자들의 엉터리 논리에 의해 후분양제 도입은 계속 지연됐다. 분양가 자율화와 함께 오래 전에 바뀌었어야 할 제도가 그대로 온존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제도개혁을 제때 하지 않을 때 경제 전체로 얼마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지를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도리어 8.21 부동산 대책에서 후분양제 보완이라는 식의 편법으로 민간 주택건설업체가 자율적으로 후분양제와 선분양제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사실상 후분양제를 무력화시켰다. 특히 국토해양부는 11월초 건설사들이 조기 분양에 나서 자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명목으로 재건축 후분양제를 폐지했다. 이명박정부는 여전히 건설업계와의 유착에 빠져 임기응변적 처방과 특혜 주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1] 민간주택건설사업 시행사가 부도가 나거나 파산하는 경우, 또는 공정률이 당초 예정보다25% 이상 늦어져 아파트 분양계약자들이 분양 이행을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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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인 2009. 1. 13. 09:56

정부가 6일 이른바 '녹색 뉴딜' 구상을 발표, 오는 2012년까지 총 50조 원을 투입해 새 일자리 96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 정부에서 발표한 사업들과 4대강 하천 정비 등 개발시대의 건설토목사업 위주의 사업들을 ‘녹색 뉴딜’이라고 포장한 것은 저질 소시지를 스테이크로 포장한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전체적인 토목사업을 녹색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일주 자전거도로 건설사업도 사실 따지고 보면 또 하나의 콘크리트 사업일 뿐입니다.

 

도심의 자전거 도로를 확충해 자전거 출퇴근을 늘리고 기존 교통수단 이용률을 낮춤으로써 에너지를 절감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한편 교통혼잡을 줄여야 친환경 사업이 되는 것이다. 자동차교통 혁명을 이뤄냈다고 하는 프랑스의 벨리브가 모두 도심 내에 자전거도로를 만들고 자전거 대여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자전거도로는 어떻습니까? 네덜란드는 도로 예산의 10%를 자전거 시설을 지원하는데 지출하는데, 2007년 자전거 시설에 대한 국비 투자액은 102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자동차도로 사업에는 올해의 경우 약 10조원을 배정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들 경우에도 최근 몇 년간 자전거도로를 대폭 확충한다고 했지만, 실제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도로는 거의 없습니다. 자전거도로를 보도에 만들어 놓았지만 각종 주행방해 시설물이 즐비하고 폭도 극히 좁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금 달리다 보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심지어 인도에 페인트로 줄만 그어놓고 자전거도로로 우기는 것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러니 자전거의 교통수단 분담률이 네덜란드는 27%, 일본 14%, 독일 10%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2%에 불과한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데 도심 내에 자전거도로를 만들지 않고 전국 해안을 따라 자전거도로를 내면 어떻게 될까요? 전국일주 자전거도로가 생긴다고 도심 내 통행량이 줄어들까요? 전국일주 자전거 도로를 이용할 사람들은 결국 큰맘먹고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도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이고 그런 도로가 생기면 이용을 하고는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요가 얼마나 될까요? 또 전국일주 자전거도로 수요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도심의 교통량이 절대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에너지 절감도 온실가스 배출 감소도 되지 않습니다. 자전거 장거리 여행자들의 새로운 수요를 위해 거액의 예산을 들일 뿐입니다. 비용 대비 편익이 1이 넘을지 정말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결국 그 자전거도로를 닦기 위한 도로사업은 결국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만드는 토목사업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불요불급한 토목사업에 예산을 들이고 건설업체들 좋은 일만 시킬 뿐입니다.

 

더구나 이 사업은 제가 볼 때 시작일뿐이고, 계속 잇따라 자전거용 도로포장사업을 확대재생산할 것입니다. 전국 일주 자전거도로가 생겼는데, 해안 일주 도로만 닦고 말겠습니까? 곧 건설족들은 각 주요 길목별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를 내자고 하겠지요. 그때마다 ‘친환경’이니 ‘그린’이니 하는 포장을 달아가면서요.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자전거도로 사업은 계속 확대되고, 계속 해마다 예산도 늘어나겠지요. 실제로 이번 정부 발표자료를 보면 ‘자치단체가 개설한 자전거도로와 연결사업 추진’이라고 해서 그런 가능성을 이미 명시해뒀더군요. 토건족들이 가장 수익을 많이 남기는 사업이 도로 예산인데, 자동차도로가 어느 정도 포화상태에 이르니 이제는 새로운 도로수요를 만들어낼 명분을 만들어내는군요.

 

해안일주도로 건설사업에 들어갈 예산만 2008년 불변가격으로 1조 2456억원이네요. 그런데 자전거 도심 급행도로 시범사업에는 3000억원을 배정했습니다. 사실 10km 3개 구간, 총연장 30km를 닦는데 3000억원을 퍼붓는 것은 건설업체들에게 엄청나게 퍼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전거도로 1km당 100억원이라니요. 그래도 이왕 퍼줄 돈이라면 그나마 전국일주 자전거도로 만드는데 쓰는 것보다는 도심 내 자전거도로 확충에 쓰는 것이 100배 낫지요.

 

그런데 이 사업의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더욱 불쾌하군요. 정부 자료를 보면 이 사업을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중인 자전거 길 만들기 사업과 연계를 추진’한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을 ‘녹색 뉴딜’로 포장한 것부터가 가당찮은 이야기이지만, 전혀 별개의 사업처럼 보이는 사업조차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숙원사업 추진을 위한 포석으로 삼다니요. 어떤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자신들의 하려는 일은 기필코 해내고 마는 이들의 똥고집에는 질릴 뿐입니다. 현 정권이 이처럼 기를 쓰고 건설업체들을 먹여살리려고 애쓰는 한편에서는 단돈 몇 만원의 지원이 아쉬운 빈곤층과 소외계층이 즐비합니다. 그런데도 경제성과 시급성이 거의 없는 대규모 건설토목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탕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예산 탕진은 매년 누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아무리 예산을 늘려도 지역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핑계로 불요불급한 대규모 토건사업을 또 다시 일으키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경기부양을 하더라도 과거에 꼴아박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준비하는 경기부양을 할 수는 없을까요? 미국 오바마 차기 행정부의 계획처럼 제대로 된 신재생 에너지 투자, 매우 지체돼 있는 노후 교량 및 도로의 유지 보수 투자, 의료시스템의 전산화, 광역인터넷망 확충, 21세기형 도서관, 실험실, 교실 증개축 같은 사업들은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투자입니다. 이 같은 방안은 현재 미국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현재의 경기를 부양할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투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경기부양책으로서 당장의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겠지만, 그 큰 틀의 방향에 대해서는 상당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시대착오적 토건형 개발사업에 투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도 마치 미래지향적인 투자인 것처럼 국민들을 우롱까지 해가면서 말입니다. 그런 이면에 우리 아이들의 도서관, 실험실, 교실은 여전히 열악한 상태이고, 소외된 이웃들은 단돈 몇 만원이 없어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홑이불로 추운 겨울을 지새고 있다는 점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더 많은 토론과 정보 공유를 원하시는 분들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을 방문해 주십시오.
by 선대인 2009. 1. 8.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