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인들이 감옥에 많이 가야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PD수첩 방송 내용에 대한 검찰 수사와 민영화 위협 등 현 정부의 방송장악 시도에 맞서서 투쟁하고 있는 문화방송(MBC) 노조의 박성제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추석 전인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MBC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결코 투사형 이미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라고 할까? 그런 그가 자신이 감옥에 가는 것까지 마다 않고 공영방송 사수 투쟁을 벌이는 이유는 뭘까? 그를 통해 한 시간 반 동안 MBC노조의 입장을 들어보았다.

박위원장은 우선 현 정부는 신문 방송 겸영 허용과 방송법 시행령 문제, MBC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 등을 통해 조중동과 재벌 기업들의 언론 시장 지배력을 높이고, 자신들의 재집권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현 정부의 방송시장 재편 의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현 정부가 공영방송 KBS나 MBC는 죽이고, 대항하는 보수 편파언론을 만들어 방송시장 판도를 바꿔 여론을 자신들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것”이라며 “방송시장에까지 조중동이 진출해서 군소신문과 군소방송, 지역방송, 종교방송을 모두 무너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신문 방송 겸영 문제가 가장 먼저 터질 텐데, 이 문제가 본격화되면 우리는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KBS나 SBS는 죽는 줄 알면서도 현재 경영진 성향으로는 안 나설 것이고, MBC도 사장이 뚝심 있는 사람은 아니다”며 “그래서 우리 노조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총파업 투쟁이 벌어지면 노조 집행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며 “그렇게 해서라도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공정방송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공정언론을 훼손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막아낸 언론 종사자들의 투쟁이 있었다”며 “공정방송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진보방송, 좌파방송이 아니라 기자와 PD들이 취재한 대로 서민들의 어려움을 전하고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 MBC가 민영화되면 직원들 월급이 더 올라갈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력히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오너를 상전으로 모시고는 공정방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위원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저희는 결코 거창한 신념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이 우리를 가만 안 놔둔다”고 했다. 그는 “소름끼칠 정도로 속이 뻔히 보이는 현 정권의 음모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안 나설 수 없다”며 “많은 분들이 우리 상황을 이해해주고 도와줄 거면 화끈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믿을 것은 결국 여론의 힘뿐이라는 것이었다.

필자도 소위 족벌 신문 기자 출신으로 재직기간 동안 불공정 편파 보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많았다. 그만큼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MBC노조의 결연한 투지가 고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론인이 감옥에 많이 가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우리 사회가 점점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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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제 노조위원장

-방송이 방송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은 MBC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른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달라.

오래전부터 한나라당이 MBC를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선 이후 이 같은 주장이 더 거세졌다. MBC 내부에서도 긴장감이 점점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신임사장이 된 엄기영사장은 원칙적으로 민영화를 반대한다고 했다. 구성원들은 엄사장이 앵커로서 폭넓은 영향력과 신뢰도를 쌓았으니 정권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 동안 PD수첩의 쇠고기 광우병과 관련한 보도가 있었고, 촛불집회 정국이 계속됐다. 코너에 몰려 있던 정부가 7월부터 반격에 나서면서 PD수첩의 방송 내용에 대해 방송통신위와 검찰 등 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 조중동은 국민들이 PD수첩의 왜곡보도에 놀아났다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가 MBC의 내홍을 불러왔다. MBC 내부에서는 전체적으로 PD수첩의 방송 내용이 크게 문제 있었다고 보지 않았다. 일부 오역이 있었지만, 검찰수사를 받을 사안은 아니었다. 이를 빌미로 정부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제작진을 체포하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방위적인 집권세력의 압박에 대응해야 했다. 지금 당장 탄압을 받아 힘들더라도 그 길이 장기적으로 공영방송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대부분 직원들은 생각했다. 정권이 PD수첩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다. 방송 내용이 왜곡됐다면 언론중재 등 법에 정해진 절차를 밟으면 되는데 검찰을 동원해 압박하는 것은 국면 전환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에서 터졌다. 엄기영 사장이 정권의 압력에 굴복했다. 엄사장은 ‘PD수첩 방송 내용에 대한 정부의 사과방송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더라. 이유는 정권과 끝까지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금 실수한 것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사장도 우리 잘못이 별거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정권과 끝까지 싸우는 데 대한 부담, 광고 압박에 대한 부담 등을 우려했다. 겁을 먹은 것이다. 우리 노조는 이러한 자세가 대단히 잘못 됐다고 봤다.

사과방송 이후에 정권의 민영화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신문방송 겸영 등 매우 큰 문제가 있는 미디어 정책을 정권 차원에서 밀어붙이고 있다. 방통위 업무보고에서 이미 큰 줄기가 나왔지만, 한나라당이 신문법과 방송법 개정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간다면 우리도 총파업 투표를 하고 다른 방송 및 조중동을 제외한 신문들과도 연대 총파업을 진행할 것이다. 검찰이 PD수첩의 PD들을 체포하느니 마느니 하고 있어, 지금 2주 넘게 24시간 지키고 있다. 20여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사수대를 운영하고 있다. 노조집행부도 사무실에서 계속 철야를 하고 있다. 우리 노조는 경영진과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굴욕적인 사장의 처신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 보신주의적이고 정권에 거슬리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는 경영진이 한심하다. 우리 노조는 사과방송 이후 경영진측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그런데 최근에 또 일을 저질렀다. PD수첩 담당 PD를 인사조치한 것은 넘어갔지만, 이번에 엄 사장이 직접 발탁한 시사교양국장을 6개월만에 교체했다. 정권에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고 있으니 봐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영진과 노조가 똑같이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행태는 너무나 굴욕적이고 MBC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다.

 그리고 정세 판단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우리가 엎드린다고 해서 MBC에 대한 정권의 압박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휘두르니 엄사정이 굴종하고 타협한다고 생각해 더 만만하게 볼 것이다. 그래서 우리 노조는 정권과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경영진에 대해서도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타협하자는 쪽으로 몰고 간 부사장과 기획조정실장에게 직접 퇴진을 요구했다. 이번 주부터 피케팅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번 주말부터 엄기영 사장 체제 6개월의 문제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할 생각이다. 조합원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 위한 것이다. 일반 사원들에 비해 노조 집행부가 너무 강경하다고 경영진은 말하는데 정말 그런지 보자는 것이다. 설문결과에 따라 노조집행부에게 싸우라고 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강하게 투쟁하고, 안 그렇다면 접겠다.

 -조합원들의 설문 결과가 투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올 것이라고 믿나?

당연히 자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PD수첩 사과방송 나갔을 때 서울에 있는 1000명 조합원 중에 3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나왔다. 노조원간의 분열은 전혀 없다. 일부 간부들은 너무 싸우면 안 된다고 경영진에 말했을 수 있지만 전체 노조원 생각은 다르지 않다. 조합원이 아닌 대부분 간부 선배들도 노조가 잘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엄사장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노조가 제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엄기영 사장은 최장기 앵커를 하며 국민들에게 상당히 신뢰받는 언론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나?

 본인의 캐릭터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언론인으로서 쌓아온 체면과 이미지가 있으므로 중요한 순간에 원칙과 정도에 맞는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가 어긋났다.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다. 사장 본인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기보다는 주변 사람들 얘기에 자꾸 휘둘리는 것 같다. 지금 경영진이 보수적이다. 임원들의 생각은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야 연임도 하니 노조나 젊은 사원들의 강경한 태도를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할 수 있다. 심지어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문순 사장 때도 임원들은 그런 경향이었다. 사실 임원들은 그런 측면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서로 보완이 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영방송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방송민주화 투쟁을 통해 쌓아온 공영방송의 전통을 버리고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MBC는 노조가 운영하는 노영방송’이라는 비판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있다. 올해 방송 드라마 시청률이 안 좋아 경영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노조는 경영진에게 ‘고통 분담할 생각이 있다. 그러니 돈 문제는 너무 걱정 말고, 외풍을 막아달라’고 주문했다. 현 상황에서 언론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외압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경영진이 그걸 못하고 있다. DJ나 노무현 정부 때도 외풍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풍은 사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문순 사장 때와 비교한다면 어떤가?

당시에는 정권이 부탁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권력기구나 여당까지 나서서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삼성X파일 때나 황우석 보도와 관련해서도 외풍이 있었다. 황우석 교수 보도 때는 처음에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기에 훨씬 위기감이 더 컸다. 나중에 우리 보도의 진실이 밝혀져서 그랬지, 안 그랬으면 회사가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향후 방송법 시행령 개정 문제가 현 정부의 방송시장 개편에서 핵심적 쟁점이 될 것 같은데,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방송법 시행령 개정의 핵심은 현행 자산총액 3조원 이하 기업에서 10조원 이하 기업까지 종합방송 및 보도방송 소유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CJ의 자본금이 10조 3000억원이다. CJ는 자산을 약간 조정하면 당장 내년부터 10조원 이내로 맞출 수 있다. CJ는 이미 10여개 안팎의 채널을 갖고 있다. CJ는 아직 삼성과 무관하지 않다. CJ뿐만 아니라 현대, 엘지 등 재벌 기업과 연관된 회사들이 지상파 방송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 그렇게 되면 전체 TV 시청가구 1900만가구 가운데 1500만가구가 케이블을 통해 보고, IPTV가 150만 가구 정도 된다.

이렇게 되면 지상파와 케이블의 종합편성채널과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케이블을 뭉쳐서 종합편성하고, 정권의 지원을 받아 채널 12번, 13번으로 들어오면 일반 공중파 TV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공중파이므로 중간광고도 못하는 등 전체적으로 광고 규제를 많이 받는다. 광고 영업도 할 수 없고, 요금도 코바코(KOBACO.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묶고 있다. 그런데 케이블 PP(프로그램 공급업자)는 그런 규제를 전혀 안 받는다. 게다가 조중동과 재벌 기업들이 컨소시엄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조선일보가 CJ나 현대와 합쳐 신문과 패키지로 영업한다면, 기존 공중파가 위협받는 상황이 된다.

조중동은 신문으로 돈을 못 버니, 방송으로 돈벌이하려 하는 것이다. 방송시장에까지 조중동이 진출해서 군소신문과 군소방송, 지역방송, 종교방송을 모두 무너뜨릴 것이다. 언론판도 자체가 조중동과 대기업 위주의 종합편성 채널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여론도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특별히 MBC나 KBS2를 민영화 안 시켜도 된다. 신문과 방송 겸영을 허용하면 이미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다. 기존 공중파 방송을 약화시키고 우호적인 족벌언론 세력을 키워주면 우파 정권 재집권에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신문 방송 겸영 허용과 방송법 시행령 문제, MBC 방송문화진흥회법 등을 개정하려는 것이 모두 같은 의도 때문이다. 공영방송 KBS나 MBC는 죽이고, 대항하는 보수 편파언론을 만들어 방송시장 판도를 바꿔 여론을 자신들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신문 방송 겸영 문제가 가장 먼저 터질 텐데, 이 문제가 본격화되면 우리는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다. 3개 방송사와 조중동 이외 나머지 신문들이 일제히 비판하면 정권의 시도를 막을 수 있다. KBS나 SBS는 죽는 줄 알면서도 현재 경영진 성향으로는 안 나설 것이다. MBC도 사장이 뚝심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노조가 나설 수밖에 없다. 총파업 투쟁이 벌어지면 노조 집행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인들이 감옥에 많이 가야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킬 수 있다. 우리가 먼저 몸을 던져야 한다면 던지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권 차원에서 얼마나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는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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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의한 PD수첩 제작진 체포를 막기 위해 농성하고 있는 MBC노조원들.(MBC노조 제공)


-말씀을 들어보면 의지가 아주 결연한데, 원래 투사형 기질이 있다고 생각하나?

나도 원래 결연한 놈이 아닌데,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고 있다. 내 임기가 내년 2월말까지인데 남은 5,6개월의 상황이 예상대로 간다면 팔자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나도 마찬가지지만 MBC에 빨갱이나 과격한 사람은 없다. 다만 소중한 일터와 민주주의 국가 언론의 기본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노조위원장을 맡게 됐나?

 MBC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선으로 노조위원장을 뽑은 적이 없다. 직능별로 차장급 정도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선후배들이 폭탄주를 먹이며 회유와 협박으로 (그는 이 대목에서 빙긋이 웃었다) 끌고 내려와 노조위원장을 시키는 게 전통처럼 돼 있다. 노조위원장을 맡고 보니 집에서 타박이 심하다. 7월에 KBS지키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언론노련 위원장과 함께 경찰서에 연행됐다 나온 적이 있는데, 그때 집에서 타박을 많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경찰서에) 들어갔다가 못 나오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더라.

-MBC민영화에 대한 정부 의지는 어느 정도로 보나?

엄청 강하다. 하지만 정부 뜻대로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DJ정부 때도 정부가 MBC민영화를 시도했다. 당시 방송개혁위원회가 정치인과 시민단체들로 구성해 지역MBC부터 시작해 본사도 판다고 했는데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좌절됐다.

우선 특혜논란이었다. MBC를 재벌에게 주면 특혜다. 중소기업에 준다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이든 MBC을 인수하는 순간 재벌이 된다. MBC의 자산가치가 10조~20조원이나 된다. 그리고 MBC는 지금도 매년 수백억원의 순이익을 낸다. 전국 MBC가 갖고 있는 부동산을 생각해보라. 태영이라는 중견건설기업이 SBS를 인수하면서 재벌이 된 것을 생각해보라. 어떤 회사든 MBC를 인수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 뉴라이트쪽의 김우룡 교수 같은 이는 국민주 방송을 운운하는데, 국민주 하는 순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쪽의 정수장학회가 30%의 지분으로 최대 주주가 된다. 그런 상황은 이명박 정권이 별로 안 좋아할 것이다. 이런 난관들이 많이 있다.

MBC의 소유구조가 이렇게 된 데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80년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정수장학회 이외 지분 70%를 KBS에 줬다. 87년에 법을 개정해 방문진이 대주주가 되고, 방송위원회에서 이사들을 임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MBC 경영진을 방통위가 임명하도록 된 것이다. 정권에 따라 성향이 바뀌지만 6대 3 또는 5대 4정도로 친여권 성향 인사들이 방문진 이사가 된다. 지금은 노무현 정권 시절 이사회지만 곧 한나라당 성향 이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과거 10년 동안은 MBC가 정권에 그다지 휘둘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김중배씨 같은 분이 사장으로 오기도 하고, 노무현 정부도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긍희 같은 보수적 인사가 사장이 되기도 했다가, 최문순 같은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장이 되기도 했다.

-박위원장의 이야기는 ‘MBC가 정파적 입장에서 한나라당을 편파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 집권세력의 시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김중배 사장은 방문진 이사들이 작당해서 청와대에서 미는 사람을 제끼고 모셔온 분이다. 김중배 사장이 와서 MBC 독립성을 확립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워낙 배짱이 좋고 언론계 거물이니 가능했다. 김중배 사장은 전 직원들에게 ‘외압 걱정 말고 소신껏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 미디어비평 같은 프로그램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공영방송은 그동안 진행해온 방송민주화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MBC를 관제방송으로 만들자거나 민영화하자는 것은 이명박 방송이나 재벌방송을 하라는 것이다. 특히 국민주 방송을 운운하는 것은 미끼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완벽한 국민주방송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 사장을 뽑을 때 완벽히 독립된 사장을 뽑는다면 현 정권에 안 좋겠지. 지금은 방문진 이사들을 통해서라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전혀 제어할 수 없는 방송이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것을 정부가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국민주 방송하자고 몰고 가면서 민영화 등 다른 꼼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MBC를 민영화하려고 한다면 정부가 어떤 식으로 갈 것 같은가?

KBS에 대해 국가기간방송법을 만들려 한다. KBS와 EBS는 한데 묶어 국회가 통제하고, KBS2는 민영화하려 한다. 그런데 NHK가 사실 중계방송으로 흐르고 힘이 약한 방송이 된 것은 정권에 묶여서 그렇다. 일본의 나머지 민영방송들은 상업 방송으로 모두 수익만 추구하는 방송들이다. 언론으로서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MBC를 그런 식으로 관제방송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민영화하라고 협박할 것이다.

-현 국면에서 정권의 방송 장악 기도를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죽도록 싸우는 방법 밖에 없다. 6.10 때 100만명 모였을 때 그때만 해도 국민들이 MBC 민영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의 악랄한 탄압 때문에 사람들이 겁을 먹어 촛불이 사그라들었다. 나도 서너번 촛불집회 나가봤지만, 8월 이후로는 정말 무섭더라. 정권이 다 잡아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겁이 나서 집회에 못 나간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국 잠재된 여론을 잘 살려야 한다. 정부의 방송장악 진행과정을 잘 알려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총파업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야당은 이제 방송 장악 기도를 막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깨달은 것 같다. 방송을 빼앗기면 절대 재집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는 극한 상황을 맞아야 국민들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92년 MBC에 공권력이 들어와 기자와 PD들이 끌려간 것과 같은 상황이 다시 올 것이다. 우리도 피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너무나 확실히 보인다. 피할 수 없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할 생각이다.

-KBS와 YTN에는 어쨌든 정권에서 미는 인사가 사장으로 왔고, KBS는 노조원들마저 분열돼 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나?

KBS가 보조를 맞춰 주면 좋은데, KBS 내부의 문제가 있는데다가 노조가 임기말이다. 사원행동이라는 조직이 있지만, 노조라는 합법적 조직에 기반해서 싸우는 것보다 힘이 달릴 수밖에 없다. 총파업이나 노동쟁의가 쉽지 않다. 현재 노조는 팔짱끼고 있으므로 지금 상태라면 KBS와 함께 싸우는 것은 쉽지 않다. MBC가 총대를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SBS 노조는 생각이 우리와 똑같지만 오너가 있는 기업이어서 한계가 있다.

국정감사 끝나는 10월말이면 총파업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YTN에 공권력이 투입된다면 연대 투쟁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총파업을 앞당길 수도 있다. KBS 신임 사장 임명 때도 KBS노조가 파업 들어가면 같이 파업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몇 가지 변수가 생기면서 발을 담글 수 없었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공영방송 사수라는 굳은 결의를 갖고 있어 총파업으로 가는 데는 별 문제 없다.

-결국 국민 여론이 호응해줘야 총파업을 하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 여론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가?

국민들이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조중동이라는 집단의 실체에 대해 많이 알게 됐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여론을 왜곡하는지 알게 됐을 것이다. 또 현재 진행되는 정권의 작업이 방송을 조중동에 넘기기라는 것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현 정부 미디어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결성된 미디어공공성 포럼에 참여한 200여명의 언론학자들은 진보, 보수를 망라한다. 이런 학자들이 모여서 현 정부 언론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훨씬 우호적인 환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 많은 분들과 함께 힘을 모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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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인 질문을 하겠다. 공정방송을 지키겠다고 하는데 왜 공정방송이 중요한가?

공정방송이 꼭 정부를 비판하거나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언론자유라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공정방송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작진들이 자유로이 취재하고 각자의 양심에 따라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공정방송이다. 지금 한국 언론을 크게 나눠보면 사주 있는 언론과 사주 없는 언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MBC, KBS와 한겨레와 경향, 서울신문처럼 사주가 없는 언론과 사주 있는 언론들의 논조는 매우 많이 차이 난다. 경향이나 한겨레가 자율적으로 우리 정치, 사회 환경을 직시해서 쓰는 것은 공정언론이다. 제대로 된 공정언론은 어떤 정권이든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공정방송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공정언론을 훼손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막아낸 언론 종사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MBC 노조도 마찬가지다. MBC가 첫 파업했던 것은 88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방송을 정권이 못 내보내게 해서였다. 또 우루과이라운드와 연관해 농촌의 현실을 방영하지 못하게 할 때도 파업을 했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며 파업하기도 했다. 노조 파업이 대부분 그런 역사를 갖고 있다. 공정방송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진보방송, 좌파방송이 아니라 기자와 PD들이 취재한 대로 서민들의 어려움을 전하고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이 인정받았고, 그래서 지난 10여년 동안 언론자유와 공정방송이 많이 신장돼온 것이다.

사실 MBC가 민영화되면 직원들 월급이 더 올라갈 것이다. 정권도 그런 점을 부각시키며 우리들을 회유하려 할 것이다. 민영화돼도 나이 든 간부들이나 잘릴 걱정할까 젊은 조합원들은 걱정 안 한다. 기자나 PD들은 민영화되더라도 오너가 데리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력히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오너를 상전으로 모시고는 공정방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노조가 밥그릇을 챙기고자 한다면 차라리 민영화가 낫다.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KBS노조가 논란에 휩싸이면서 MBC 노조를 사람들이 많이 주목한다. 네티즌들이나 시민단체나 학자들이 ‘이제 MBC 노조밖에 안 남았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책임감이 많이 들고, 부담도 된다. 저희는 결코 거창한 신념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이 우리를 가만 안 놔둔다. 착실하게 회사에 다니던 회사원들, 수업 받던 학생들이 못 참아서 촛불을 들고 나왔듯이, 우리도 가만히 일만 하고 싶은데 상황이 우리를 계속 내몬다. 소름끼칠 정도로 속이 뻔히 보이는 현 정권의 음모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가 안 나설 수 없다. 너무나 한심하고 황당한 정권의 작태가 우리를 투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다. 많은 분들이 우리 상황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도와줄 거면 화끈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 나라꼴 돌아가는 것이 너무나 한심하다. 미디어공공성포럼 출범식 갔을 때 만난 한 언론학자가 촛불집회에서 여중생, 여고생들이 ‘언론장악 반대’ 팻말을 만들어 들고 나왔을 때 너무 부끄러웠다고 하더라. 그런 국민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언론개혁'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연구소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으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9. 17. 08:25



정부가 ‘광역경제권 선도 프로젝트’ 사업에 향후 5년간 56조원을 투입한다고 하는군요. 이 가운데 53조여원이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및 산업단지 조성 등 개발사업에 들어가는군요. 겨우 2조3000억원이 지식산업 및 첨단기술산업 지원에 투입되는군요.

 

이 계획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이 듭니다.

 

우선, ‘삽질경제학’의 대가이자, 건설족의 우두머리 출신 대통령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경제대통령’으로 포장했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경제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마땅한 방법을 모르겠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려면 부동산 거품을 빼고 국가 정책의 틀을 콘크리트가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제로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될 리 없죠.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추진해도 어려운 문제인데, 반칙과 편법, 부정이 판치던 개발경제 시대의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 개념조차 가지고 있을까요?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등 자산경제가 지나치게 부푼 상태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계속 급전직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잠재력을 제대로 확충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전시행정과 단기 눈속임 성과주의의 귀재인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언행이나 정부 정책을 보면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확충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대통령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전공 분야이고,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개발 사업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하면 각 지역에도 선심을 쓰는 격이니 정치적으로도 득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 잇따른 정부 발표를 보면 정부가 내심으로는 개발사업을 통해 시중유동성을 확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건설업체들에게 사실상 특혜금융을 주는 환매조건부 미분양 매입 등 건설업체들에게 종합선물세트를 안겨준 ‘8.21 대책’을 비롯하여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 재개발 재건축 완화, 새만금 개발 본격화, 죽어가던 한반도 대운하 되살리기, 그리고 이번 광역경제권 개발 발표 등이 모두 대규모 개발 사업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9월 위기설’이 사실상 소멸됐다며 의기양양해 하지만, 원래 9월에 외환을 통한 위기가 바로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경제의 위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속병을 가진 구조적 위기이지, 단기적 위기가 아닙니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 내수 침체, 자산 및 소득 양극화, 성장 잠재력 고갈, 막대한 가계 부채 급증 등이 부동산 버블을 고리로 지난 10년간 확대 재생산돼온 상황입니다. 한국 경제의 핵심 위기는 오히려 이처럼 외환위기 이후 누적돼온 구조적 위기입니다. 그런데 정부도 내심 부동산 버블이 붕괴될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그것이 가져올 신용 위축 사태가 우려되겠지요. 그래서 각종 개발사업과 전매제한 완화 조치 등을 통해 시장에 돈이 돌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2롯데월드 건설 허가라든지, 새만금 개발사업 추진, 한반도 대운하 되살리기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서울과 수도권에서 민간이 추진하는 초고층 프로젝트 등 대규모 개발프로젝트들이 많지만 당장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사업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는 다릅니다. 롯데그룹 계열사 부사장 한 분은 저와의 전화통화에서 “경기를 살리려면 당장 돈을 풀 수 있어야 하는데, 다른 데는 자금 조달하는 데만 상당한 기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수조원의 현금을 바로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롯데그룹 차원에서는 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내세워 이번 허가를 땄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정부가 살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말은 물류니, 관광이니 내세우지만 자신들도 제 정신이라면 이게 안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정말 자신들 생각을 믿는다 해도 향후로는 시중 유동성 확대라는 차원에서 진행하려 할 것입니다.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를 통해 외국자본까지 유치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이번 ‘9월 위기설’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정부 스스로도 잘못하다가는 외환 유동성 위기가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고 느꼈을 겁니다. 실제로 건설업계 안에서는 정부가 대운하 되살리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특히 새만금 사업의 경우에도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를 통해 외환 유동성을 확충하려는 의도가 상당히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추정에 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하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해소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경제의 핵심적 문제들인 소비 위축, 내수 침체, 실업률 증가, 양극화 확대, 고물가 고비용 구조 등의 문제는 상당 부분 부동산 거품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우선, 가계부채의 증대와 이에 따른 이자 부담 증가로 가계의 소비 여력이 급격히 위축됐습니다. 또한 소비재와 달리 가장 값비싼 생활 필수재인 주택 값은 상승하면 그만큼 실질 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또 주거비 부담이 상승하면 이를 부담하기 위한 임금 상승이 합리화돼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집니다. 자산 양극화가 심해지고 이로 인한 사회적 위화감도 증대됩니다. 토지 비용의 상승으로 경제가 고비용 구조로 흐르게 돼 중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거품은 형성되면서 이미 막대한 경제적 폐해를 낳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부동산 등 자산 경제의 영역과 생산경제의 영역이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제 자원이 부동산에 편중되도록 집값 거품을 키우고 유지하면서 7~8년을 지속해왔다. 그런데 현 정부는 집값 거품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여기에다 지금 대규모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각종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의 개발 사업들이 막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각종 개발사업들을 또 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발사업들이 모두 필요한 것이라면 말도 안 하겠습니다. 당장 이번에 발표한 계획만 봐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수두룩합니다. 예를 들면, 대구, 구미, 포항, 광주·전남, 서천 등 5곳에 새로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존에 형성된 산업단지와 과학기술테크노파크 등의 사업과 뭐가 다른지 의문입니다. 문제는 산업단지 조성을 통한 부지 제공이 아닙니다. 기존 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이 기술과 지식, 정보를 공유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 ‘연계 혁신(connected innovation)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한 클러스터는 부지라는 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교와 연구소 등이 기업들과 강력히 연계된 성장연합을 이뤄갈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중심이 돼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 세계 각국이 추진하는 첨단산업클러스터를 통한 경제성장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전 없이 새로운 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부동산 개발사업에 불과합니다. 산업단지가 제대로 된 의미의 클러스터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부동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입주기업들에게 땅장사를 하게 하기 십상입니다. 더구나 얼마 전 KBS스페셜에도 나왔지만, 지방 및 수도권의 제조기업들은 오히려 한국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산업용지에 대한 수요는 줄어드는데 새로 산업단지를 조성하면 거기에 얼마나 들어설까요?

 

동남권역에 조성하겠다는 ‘동북아 제2허브공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강원도 양양과 경북 울진, 전남 무안 등 지방 공항들이 페쇄되거나 이용객들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더구나 경남 김해공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새로 공항을 짓는다면 충분한 수요가 생길까요? 마산∼거제 연륙교를 지어 해양관광을 활성화한다거나, 대경권에 3대 문화·생태 관광기반 조성을 한다는 사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전 정부에서 앞다투어 나섰던 대규모 관광개발 사업들 중에 지금 성공한 것이 있습니까?

 

한 마디로 그냥 개발사업을 했을 뿐, 이후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신경을 안 쓰는 것이 지금의 정부관료들입니다. ‘공급을 하면 수요는 생긴다’는 근거 없는 희망에 따라 개발계획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는 개발시대 때에나 통하던 방식입니다. 개발시대 때에는 기본적인 사회인프라가 부족하니 짓기만 하면 다 수요가 생겨나고 성장 잠재력 확충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웬만한 사회기반시설은 대부분 마련돼 있습니다. 이런 콘크리트 사업에 투자해봤자, 성장 잠재력이 얼마나 확충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이용하지도 않는 공항, 도로, 관광지를 만들어놓는다고 그게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장 주변에 사시는 곳부터 한 번 확인해보세요. 제가 서울시에 재직하면서 느꼈지만, 도서관 짓는데 100억원 이상이 들어가는데 정작 매년 도서 구입비 예산은 1억원 남짓합니다. 그러니 도서관에 가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문예회관이나 공연장이라며 수백억원을 들이는데 정작 짓고 나면 질 낮은 프로그램밖에 안 돌아갑니다.

 

제가 사는 일산 킨텍스나 종합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확인은 안 해봤지만, 두 곳 모두 짓는데 수백억원에서 1000억원대는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일산 킨텍스는 일년 중 제대로 행사가 열리는 날이 아마 10일 안쪽일 겁니다. 그렇게 커다란 건물을 지어놓고는 안에서 뭐하는지 아십니까? 겨울에 인공 눈썰매장 한 켠에서 운용하고, 여름에 간이 물놀이장을 만들어 운영합니다.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기존에 있는 킨텍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지금 제2킨텍스를 짓는다고 난리입니다. 종합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2부 리그팀이 경기하는 게 일년에 10여차례에 불과한데, 그 외에는 그 큰 운동장이 텅 비어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도대체 시민들에게 거의 아무런 혜택도 돌아오지 않고, 경제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막대한 개발사업을 누구를 위해 하는 겁니까?

 

그럼 돈들이 남아돌아서, 다른 데는 쓸 데가 없어서 이런데 쓰고 있을까요? 몇 년 간 아이들을 키우던 제 처가 얼마 전부터 사회복지사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저소득층 노인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한국의 열악한 복지 현실에 마음이 찢어질 정도랍니다. 장애 때문에 생활도우미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해 변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노인, 가만 있던 집값이 재개발 붐에 4000만원에서 8000만원으로 올라 자활대상자 지원에서 제외된 노인, 한 달 생활비 10만원 정도로 버티며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떼우는 사람 등등. 아내가 담당하는 케이스만 220가구. 그런데 아내와 동료 사회복지사 한 명의 급료를 포함해 220가구를 대상으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배정된 1년 예산은 겨우 1억5000만원이랍니다. 아내는 예산이 1,2억만 더 있어도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며 안타까워합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거의 아무런 효과도 없는 일들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전체로 매년 수십조원씩 쓰면서 당장 기초적인 사회복지 체계도 제대로 구축을 못하고 있다니요. 그런데 아직도 정부 관료와 정치권은 이런 개발사업 만드는 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왜냐? 나중에야 어떻게 되더라도 뭘 만들고 짓는다 하면 사람들이 혹하니까요. 정치권은 표 얻을 수 있고, 뒷돈 받을 수 있으니 좋고, 관료들은 눈에 안 보이는 복지 프로그램 돌리느니 생색나는 실적 만들어서 좋고, 건설업체들은 사업으로 돈 벌어서 좋습니다. 관변 학자나 연구소들은 용역 프로젝트 많아져서 좋고, 언론들은 건설업체들 광고 물량 많아져서 좋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개발 옹호세력들을 저는 ‘개발 5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토건족, 건설족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일본도 버블이 붕괴할 때 토건족의 압력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가 경기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개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요도 없는 댐이 지어지고 노루와 토끼만 다니는 도로도 숱하게 생겼습니다. 많은 리조트와 골프장은 버려지고 도산했고요. 이런 개발사업에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 재정 고갈을 부추겼습니다. 이미 한국에서도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아직도 ‘개발만이 살길’인 것처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판에 부유층을 위해 막대한 감세안까지 동시에 진행하고 있으니 재정건전성에 대해 한국 정부는 최소한의 고민은 하고 있을까요?

 

이제 개발경제 시대 때의 경제 운용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가계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경제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비용 대비 효과나 수요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개발사업으로는 선진경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이들이 첨단기술경제 시대이고, 지식정보화 시대, 창조경제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국가 전체의 자원 배분이 이런 영역으로 배분되도록 해야 합니다. 첨단 기술을 고안하고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한 국가경제의 자원은 유한하기에 제한된 자원 안에서 최적의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자원 배분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사람에게 투자해 고부가가치 서비스를 창출하고, 첨단기술을 육성합니다. 한국 같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창조적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산 가공하고,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인재를 키워냅니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 보스턴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보스턴에 대규모 공장이 있는 것도, 고층 아파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100년 이상 된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웬만한 도로는 누더기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보스턴이 못 사는 동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스턴의 평균 가구 소득은 미국 평균의 약 2배 정도입니다. 소득 수준으로는 미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 도시입니다. 싱가폴이 2000년대 초반 일시적인 불경기로 휘청거릴 때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았던 도시도 바로 보스턴입니다. 보스턴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은 싱가폴 경제는 이후 생명공학기술과 의료산업 등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보스턴에 뭐가 있길래 행정구역상으로 60여만명, 광역 보스턴(Greater Boston)으로 따져도 340만 정도에 불과한 도시가 그렇게 두각을 나타낼까요?

 

보스턴에는 인재가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과 MIT, 보스턴대학(BU), 보스턴칼리지(BC),터프츠 대학 등을 필두로 100여개의 각종 대학들에서 매년 엄청난 인재가 쏟아져 나옵니다. 많은 인재들이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진출하기도 하지만, 보스턴에 남아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합니다. 하버드 의대 협력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을 중심으로 의료산업이 발달해 있고, 관련 분야에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을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제약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MIT를 중심으로 한 각종 IT산업과 로봇공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재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미국 전역에서 이전해옵니다. 또한 인재들은 자신들의 벤처기업을 만들어 미래의 빌게이츠를 꿈꿉니다. 베인 앤 컴퍼니나 보스턴 컨설팅그룹 등 세계 유수의 컨설팅펌들도 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역시 보스턴에서 배출된 우수한 인재들이 이들 회사의 토대가 됐습니다.

 

보스턴 필하모닉과 보스턴 발레단처럼 보스턴은 젊은 예술혼과 창조성이 살아 숨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인구 60만의 도시에 공립도서관만 36개나 됩니다. 인구 1000만의 도시 서울에 ‘독서실 같은 도서관’이 아닌, 진짜 공립도서관이 30개도 채 안 되는 것과 너무나 비교됩니다. 이런 보스턴 경제의 활력이 모두 사람과 교육, 문화에서 나왔습니다. 제대로 된 선진경제가 가는 길이 바로 이런 방향입니다. 한국 경제가 미래를 기약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도 가야 하는 방향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결국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자식 세대가 살 수 있는, 한국 경제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첫 걸음은 무턱대고 내지르는 토건국가적 개발사업 남발을 자제해야 합니다. 충분히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각종 건설토목사업에 돈을 쏟아 붓는 과거 일본과 같은 토건국가적 행태는 멈춰야 합니다. 대신 그렇게 아낀 돈을 저렴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질 좋은 교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초중고 과정에서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강화하는 교육을 만들고, 오히려 ‘경쟁의 무풍지대’인 대학이 경쟁하도록 해야 합니다. 재벌 기업들의 독과점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구조 대신 국내시장에서도 국제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몸과 마음을 키울 수 있는 더 많은 도서관을, 더 많은 문화공연장을, 더 많은 체육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소득층과 노후세대를 위한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체계적으로 마련해가야 합니다. 제대로 된 공공건설사업 발주 시스템을 만들면 이를 위한 예산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주택 및 부동산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진국 대비 5%도 안 되는 공공주택 재고를 20~30% 수준까지 높여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등 자산 거품을 만들지 않는 부동산 세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후분양제 확대와 공공부문의 주택 원가 공개 등 소비자 중심의 주택 시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콘크리트가 아닌 사람에게 투자하는 경제에 희망이 있습니다. 땅과 집이 아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제대로 키우는 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식세대 홀로, 또는 부모세대 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합심해서 힘과 지혜를 모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by 선대인 2008. 9. 12. 15:30

그제(9월 9일)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와 어머니 우갑선씨를 만났습니다. 약 10년 만의 재회입니다. 점심 약속 장소로 가는데 가슴이 뛰더군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던 소녀. ‘희아’라고 불렀던 소녀는 이제 23살의 숙녀 ‘희아씨’가 됐습니다. 하지만 동안(童顔)인 희아씨는 10년 전 모습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제가 이희아씨와 무슨 관계냐고요? 하하.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이던 99년 초 희아씨의 사연을 사회면 톱 기사로 소개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결혼 전의 아내가 희아양 얘기를 처음 전해주었습니다.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희아양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했습니다. 처음에 무척 꺼려하던 희아양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몇 차례 통화한 끝에 가까스로 인터뷰 승낙을 받아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비 내리는 밤길을 달려 서울 강동구에 있던 희아양 집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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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티 없이 맑고 환한 얼굴. 당시 희아양의 첫 느낌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어머님으로부터 희아양의 사연을 듣는데, 가슴이 자꾸 뭉클해졌습니다. 차에 남아있던 아내가 몇 번씩 핸드폰을 울렸지만, 좀처럼 자리를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취재를 마칠 무렵, 희아양이 ‘즉흥환상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아!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 네 손가락만으로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다니! 그것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습니다. 희아네 가족의 땀, 눈물, 애환, 열정, 희망, 애정이 녹아 있는 결정체였습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의 꿈을 이루려는 가열찬 투쟁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인 다음날 출근해 기사를 출고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없어 고심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데스크로부터 몇 번의 재촉을 받고 보낸 기사는 사회면 톱 박스로 큼지막하게 편집됐습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카인즈'에서 찾아본 그 기사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은 없다"-네 손가락 소녀피아니스트 이희아양


'네 손가락의 즉흥환상곡.’서울시 교육청과 한국재활재단이 초등학생들의 독후감 모집을 위해 나누어준 책의 이름이다. 태어날 때부터 두 손 다 합쳐 손가락이 4개밖에 없는 열네살 소녀의 스토리. 그러나 피나는 노력 끝에 전국 피아노 연주대회에서 ‘열 손가락’ 유치부 어린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을 차지했다.


오늘도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9년째 건반에 매달려 사는 서울 주몽초등학교의 이희아양(14·6년)얘기를 담은 책(동화작가 고정욱 기록)표제다. 24일 마감된 독후감 모집(2월6일 당선작 시상)에 응모한 어린이만도 무려 2천여명.


“사람의 작은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장애인친구도 함께 살아가야 할 내 친구가 아닌가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독후감을 적어 낸 한 어린이의 소감이다.


희아는 태어날 때부터 ‘네 손가락’이 전부였다. 두 다리도 없다. 선천성 기형으로 막대기처럼 가늘게 붙어 있던 다리도 세살 때 절단했다. 그래서 페달은 특별히 피아노 위쪽에 붙여 허벅지로 조작한다.


67년 대간첩작전에서 척추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된 아버지 이운봉씨(54)와 간호사로 이씨를 돌보던 어머니 우갑선씨(44·산부인과 조산원) 사이에서 태어난 희아. 기형의 원인은 엄마가 임신사실을 모르고 감기약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여섯살이던 91년 희아에게 연필이라도 쥐는 삶을 열어 주려고 시작한 피아노연습. 받아 가르쳐주는 학원도 없어 석달여를 떠돌아 다니다 ‘숲속피아노학원’ 원장 조미경씨(31·여)를 만났다. 조원장은 우씨가 일하던 산부인과에 입원했다가 희아의 사연을 알게 된 것.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과 오후로 나눠 10시간에 이르는 연습이 시작됐다. 그러나 희아가 짚는 건반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더 힘을 줘.” “안돼. 안돼. 그 부분 다시.”

또래 어린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고 간 뒤에도 희아와 조씨의 1대1교습은 거듭됐다. 몸살로 앓아눕고 네 손끝에 물집이 잡혔다. 네 손가락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화음은 빠른 손놀림으로 쫓아가야 했다. 그렇게 3개월여가 지나자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학교종이 땡땡땡…’을 끝까지 치던 날 온가족은 울어버렸다.


네 손가락 솜씨는 빠르게 발전했다. 1년여 뒤 참가한 전국학생음악연주평가회에서 희아는 와이만의 ‘은파(Silver Wave)’를 연주, 유치부 최우수상을 따냈다.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행진은 계속됐다.


희아는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96년 일본 장애인재활시설인 ‘꿈의 공방’을 방문해 연주하고 97년에는 국내장애인을 위한 독주회를 열어 수익금 1천만원 가량을 장애인단체에 기부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희아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꿈. 하지만 지난해의 뇌출혈 후유증으로 요즘 장시간 연습이 힘들다. 그래도 어렵고 어렵다는 베토벤 소나타 24번 ‘열정’을 하루 3,4시간씩 두드리며 꿈을 불태운다.


“아무리 해도 베토벤 작품은 칠 수 없으리라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왼손만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가 된 라울 소사라는 사람도 있다지 않아요.”


이 기사의 파장은 상당히 컸습니다.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사른 열정이 당시 외환위기에 지쳐있던 많은 이들에게 와닿았던 모양입니다. 제게는 수십 통의 격려전화가 쏟아졌습니다. 희아양은 방송에 잇따라 출연하고,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더 나중에는 CNN방송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고요. 희아양의 연주회도 잇따라 열려 많은 이들이 희아양의 '희망 바이러스'에 전염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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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우갑선씨가 쓴 수기 '신이 준 손가락'


그 해 가을 저희 결혼식 때는 희아양에게 축하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제가 사람 도리를 잘 못하다 보니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TV 등에서 희아양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흐뭇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여직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서 희아씨 어머니가 저를 언급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걸었던 10년 전 어머니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더군요.    


10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희아씨’는 이전의 앳되고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뚜렷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가진 공인이었습니다. 희아씨는 통일음악회 등에 참여하고, 북녘어린이와 장애인, 탈북자들을 돕는데 매우 열성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치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희아씨는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녀는 김대중 정부 이래로 지속돼온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대치국면으로 전환된 것에 분노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의 지원이 끊겨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물론 북한 정부당국에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북한만 ‘우리나라엔 장애인이 한 명도 없다’며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며 장애인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북한 당국을 성토하더군요. 그녀는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이명박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이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며 “자라날 아이들이 이런 대통령을 보면서 어떤 영향을 받을 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희아씨는 또 “현 정부 들어와서는 부유한 사람들만 더 잘 살고, 서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매우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습니다.


모전여전일까요? 사실 희아씨의 그런 생각과 태도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현 정부가 장애인들에게 가던 보조혜택을 많이 줄이려 한다”며 “정부는 부정수급자가 많아서 이를 없애려 한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라면 제도를 없앨 게 아니라 부정수급자를 제대로 가려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흉측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저보다 더 비판적인 것 같아 “이제 희아씨도 유명인인데 그런 말해도 괜찮느냐?”고 물으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눈치를 봐야 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채 하면 그 나쁜 짓에 동조하는 것”이라며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지도층 중에는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적인 태도는 오히려 개신교 스스로에게도 안 좋은 것 같다”며 “하나님의 참뜻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희아씨가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는데,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날 대화가 딱딱한 내용으로만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요. 희아씨는 각종 연주회 요청이 국내외에서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대부분 자선연주회라고 합니다. 당장 이달 말에 미국과 캐나다 연주 여행을 떠날 거라고 했습니다. 북미지역 장애인들을 위한 자선공연이라고 하는군요. 이미 7월에는 중국 쓰촨성 지진 성금 모금을 위해 중국 충칭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고요. 지난 9월1일에도 북측 장애인돕기 자선 음악회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가졌다고 하더군요. 9월 26일에는 마산MBC홀에서 경남통일농업협력회의(경통협)의 ‘북녘어린이 콩우유 지원사업’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1000원이면 북한 어린이 한 명에게 일주일 동안 콩우유를 지원해 줄 수 있다”며 “매월 1000원을 내는 회원 10만명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경통협 사무실 055-585-7421~2번으로 전화해서 자세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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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앨범의 CD표지


자리를 정리할 무렵, 희아씨의 연주곡 CD와 어머니가 쓰신 수기인 '신이 준 손가락' 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CD와 책 판매 수익금은 북한 장애인을 위한 항생제, 의료기구 지원금으로 기부한다고 하네요.) 희아씨의 친필 사인과 함께 말이죠. 저도 제가 번역한 책을 답례로 드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CD를 들었습니다.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량이었습니다. 희아씨는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으로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희아씨 홈페이지(www.heeah.com)에 올려져 있는 ‘즉흥환상곡’을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으면 네 손가락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는 걸까요? 희아씨의 연주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희아씨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웠고 세상을 향해 밝은 웃음을 활짝 웃게 해준 피아노! 그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을 다시,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과 친구 여러분들께 돌려드립니다.” 희아씨가 있어서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 같습니다. 

by 선대인 2008. 9. 11. 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