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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난이 심각하다. 그런데 정부는 월세 대책을 내놓았다. 왼쪽 다리가 가렵다는데 오른쪽 다리를 긁는 셈이다. 정부 논리는 이렇다. 전세수요가 월세시장으로 이동하면 전세가를 낮출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수도권에서 주거비가 높지 않은 곳에서도 대략 1억원 보증금에 월세만 70만~80만원을 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식이라면 주거비가 조금 더 높은 서울 강남 같은 곳에서는 보증금 2억원에 월세만 100만원 넘을 수도 있다. 이걸 중산층을 위한 임대아파트 정책이란다. 전세로 살다가 월세로 옮기면 주거 부담이 갑절 이상 높아진다. 이를 선택할 중산층 가정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지금의 전세난은 정부가 집값 떠받치기를 지속하면서 만들어낸 전세난에 가깝다. 정부는 잔뜩 오른 전세가가 무슨 문제냐는 식의 태도를 갖고 있다. 고작 대책이라고는 ‘빚내서 집 사라’며 전세 세입자를 매매시장 쪽으로 토끼몰이하느라 바빴다. 전세시장 안에서도 집주인들이 높여 부르는 전세가를 전세자금대출 등으로 세입자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돈풀기 정책이 대부분이었다. 전세난의 핵심이 보증금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안전한 전세’의 부족 때문인데도 이를 해소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빚을 잔뜩 진 집주인들에게 최대한 ‘버티라’는 신호를 주며, 이들이 정부 부양책과 저금리에 기대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도록 하는 바람에 전세난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번에 나온 대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동안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을 크게 완화해준 전세시장이 가급적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월세 전환 속도를 늦추는 게 정부의 바람직한 역할이다. 그런데 기업들로 하여금 민간 임대아파트를 왕창 지어서 월세 전환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전세 세입자들을 매매나 월세 쪽으로 ‘토끼몰이’해서 어떻게든 집값을 떠받치고 다주택자나 건설업자들의 이익을 챙겨주고자 할 뿐이다.
이번 대책에서도 민간 임대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정부는 택지, 세제, 자금 등 전방위적 지원책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임대료 상한선 5% 제한과 8년 임대 지속 조건 외에 거의 아무런 공공성도 확보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초기 임대료를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고, 세입자도 기업들이 마음대로 골라 받을 수 있게 했다. 공공성도 거의 확보하지 않은 채 건설기업들에 특혜를 주겠다는 것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특히 민간 건설업자가 제안하면 그린벨트 지역까지 풀 수 있도록 한 조처는 심히 우려스럽다. 이건 건설업자나 자산가들이 땅 사놓고 개발하는 식으로 투기를 버젓이 할 수 있다. 그린벨트 투기 조장책에 가깝다.
정말 필요한 건 공공임대주택 확보다. 한국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5% 수준으로 10~30%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낮다. 한국 사회의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 추세나 1인가구의 증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높은 주거비 부담 등을 고려하면 공공임대주택이나 협동조합형 주택 등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정말 중산층까지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을 공급하면서도 전세가를 안정화하고 싶다면 과거 서울시가 공급한 장기전세(시프트)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시민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고, 높은 경쟁률까지 보였다. 또한 세입자에게 매우 불리한 임대차시장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 세입자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 임대주택을 등록하게 하고 적절한 수준의 임대소득세를 물리는 한편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내팽개치고 이번처럼 건설업계와 부동산업계의 민원을 정책이라고 포장해서 내놓는 한 서민 주거가 안정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