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만행(?)이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미 세계 각국 언론들도 보도하며 그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현실의 재벌가 3,4세는 조현아 같은 사람이 더 많다. 엄연한 주식회사를 집안 재산으로, 직원들을 집안 하인처럼 여긴다. 사실 재벌가 3,4세들의 이런 행태는 일상화돼 있지만 이번에 어쩌다 그 단면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재벌 3, 4세 가운데는 ‘소시오패스(Sociopath)’ 형 인간들이 많다. (조현아 부사장을 소시오패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 재벌 3, 4세들은 이미 여러 탈불법적 상황에서 부를 대물림하고 있음에도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사실 이 같은 인간형은 한국의 재벌들에게 거의 공통된 특징이다. 4조 5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2조 원대의 탈세를 하는 등 온갖 탈불법을 자행한 이건희 회장이 오히려 국민에게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설교하는 게 전형적인 예다.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이 시비 끝에 아들을 때린 북창동 술집 종업원들을 심야에 인적이 드문 청계산으로 끌고 가서 조폭들과 함께 폭행을 가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표적인 사례는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철원 씨가 차를 매매하기 위해 찾아간 노조원을 야구 방망이로 실컷 때리고 맷값을 던져준 사건이다. 그는 경찰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을 때도 기자들 앞에서 히죽히죽 웃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의 뜻은 전혀 없었다. 사실 최철원 씨는 드러난 경우일 뿐, 재벌가 3, 4세 가운데 자신의 탈불법 행위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저질러 처벌을 받게 될 때는 ‘동정’을 구한다고 한다. 동정을 구한 뒤 다시 강자로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악행을 거듭하는 것이다. 2003년 재판에서 선처를 구해 경영 일선에 복귀했던 최태원 회장이 2011년 다시 계열사 자금을 횡령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도 ‘나눔 경영’과 사회 공헌을 떠들어댔다. 그리고 이제 법정에 다시 서게 된 그는 또다시 선처와 동정을 구하고 있다. 문제는 재벌 3, 4세로 내려오면 이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다른 국민을 등치고 희생시켜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이들이 활개 치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다수 국민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을까.
문제는 재벌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져도 미디어에 미치는 재벌의 영향력 때문에 아예 문제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될지 모른다. 특히 이 부분에 관해서는 뉴스보다 여성들이 주로 보는 드라마가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한국 드라마는 어느 순간부터 재벌가 자녀들의 사랑 이야기로 넘쳐나고 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재벌가 자녀들은 미남, 미녀에 너무나도 멋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가 자녀들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폐해나 횡령이나 배임, 주가조작, 회계조작 및 비자금 조성, 탈세 등 부정적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같은 재벌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특히 ‘신데렐라 이야기’ 구조로 끝나 재벌일가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비판의식마저 마비시킨다. 서민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나 한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정면으로 파헤친 드라마는 찾아보기 어렵다. 거꾸로 최근 드라마 ‘미생’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생생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 드라마 등에서는 장애인과의 사랑이나 대학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의 고뇌, 가업인 식당을 물려받은 가족과 이 식당에 들리는 서민들의 애틋한 사연 등 평범한 서민들의 얘기가 심심찮게 다뤄진다. 이처럼 한국 드라마들의 재벌 미화는 PPL광고 등을 통해 제작비를 재벌기업들에게 기대는 탓도 있겠지만, 이미 이들 재벌일가에 대한 찬양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춰 재벌기업들이 이들 재벌가 자녀들을 ‘셀레브리티(celebrity)'로 포장하는 언론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스포츠지나 연예지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지와 종합일간지까지 삼성그룹 이건희회장 딸들인 이부진, 이서현씨의 ’럭셔리 패션‘을 보도하는 식이다. 이런 보도들을 통해 현실의 재벌가 자녀들 이미지를 드라마 이미지와 동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를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홍보하는 재벌기업들의 홍보전략과도 무관치 않다. 이에 따라 택시기사의 배상을 면제해준 이부진의 선행(?)이 대서특필되는 가운데 관련 중소기업이나 골목사장들을 문 닫게 한 이부진씨의 베이커리사업에 대한 비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미 한국은 기존 제도권 언론에서는 재벌가에 대한 비판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보니 재벌가는 온갖 탈불법과 파렴치한 행동도 떳떳하게 자행해도 되는 특권 지배자계급으로 행동하고, 서민들도 그런 행태를 내면화하는 시대가 돼버렸다. 조현아 부사장이 터무니없는 지시를 하고, 이를 따른 기장과 승무원들의 태도가 이를 정확히 보여주는 한 단면인 셈이다. 재벌가의 횡포와 전횡, 탈불법을 엄단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복속하는 구조를 만들어온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