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외교전문가 없어 화 키운다”


김선일씨 피랍 및 사망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정을 보면 곳곳이 문제점 투성이다. 여당의 핵심 인사인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이 "대한민국의 국가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우려된다"고 말할 정도다.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살해된 김씨는 정부가 당초 발표한 17일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납치된 것이 유력시 되고 있다. 외교부도 김씨 피랍 시점이 '지난달 31일'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히고 있다. 이게 맞다면 우리 정부는 김씨 피랍 시점에서 20여일이나 지난 뒤인 21일 새벽에야 납치 사실을 파악했다. 불과 100명도 안 되는 바그다드 시내 교민들의 행방을 3주가량이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지 대사관이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사관측에 즉각 알려주도록 충분히 주지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이라크 파병을 앞둔 우리 정부의 느슨한 현지 대응 태세와 정보 수집 능력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김씨의 납치 사실이 알려진 뒤 정부는 "모든 채널을 가동해 구명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효과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 같은 잇따른 실수를 대(對) 아랍 전문인력 및 협상력 부재에서 꼽고있다.





김선일씨 피랍과 관련, 21일 오후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앞서 회의 참가자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왼쪽). 22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사진=연합]

▼전문가 부족=이번 사태로 국내 아랍 관련 인력, 특히 이라크 전문가가 크게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 이라크 대사관 및 외교부에 아랍어 전공 인력이 몇 명 있지만 아랍 전문가라고 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대외 정보를 수집하는 국가정보원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국외국어대 터키어김대성 교수는 "외교부나 국정원 직원들 대다수는 선진국 근무를 선호하고 아랍 등 오지 근무를 기피하고 있다"며 "중동 지역은 잠시 쉬어가는 곳 정도로 생각해 제대로 현지 인맥을 장기간에 걸쳐 구축한 전문가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동 관련 일이 터지면 국내의 몇몇 학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정책을 수립하는 수준으로는 현지 실정에 맞는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내 실무형 전문가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 학자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국내 중동학회 회원은 200명 가량이지만 이 가운데 제대로 학회 활동을 하는 사람은 40~50명 안팎.그나마 이집트 터키 등에서 유학한 사람이 많고 이라크에서 유학한 사람은 전무하다. 중동 특수 이후 관계가 멀어진 데다 이라크 내 정정이 불안해지면서 유학 수요가 없었던 것. 이런 경우 정부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국비를 지원해서라도 최소한의 전문 인력을 양성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중동 유학생을 육성하고 외교부 내에서도 수십년간 한 지역에서만 근무하는 지역 전문 인력을 키웠다. 얼마 전 일본인 인질들의 석방 과정에서도 이들 전문 인력들이 구축한 현지 인맥들의 도움이 컸음은 물론이다.

협상 전문가가 부족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김선일씨 피랍 사건은 일반적인 협상과 달리 '인질 협상(Hostage Negotiation)'이기 때문에 여기에 맞는 협상전문가가 협상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영화 '니고시에이터(Negotiator)'에서 보는 것처럼 인질을 잡고 있는 과격 분자나 과격 단체와 협상할 경우 관련 전문가들이 협상 상대의 반응을 점검하며 고도의 지능적인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국내에는 인질협상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국제협상을 담당할 전문가도 매우 드문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협상프로그램(Program On Negotiation)으로 유명한 하버드대를 비롯, 상당수 대학이 박사급 협상전문가들을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키워내고 있다. 또 변호사와 수사인력 및 외교 인력의 상당수가 협상 실무에 대한 체계적 훈련을 받고 있다.

이렇다 보니 김씨 피랍사건과 관련해 현지에 급파된 협상단에는 사실상 아랍전문가도, 협상전문가도 없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셈이다.▼협상과정의 문제점=정부가 이번 김씨 사건 같은 경우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사전에 인맥을 구축하는 등의 노력이 미비했기에 이번 사건에서 정부의 역할은 처음부터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제한적 상황에 더해 우리 정부는 협상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범했다.

미국에서는 인질 협상의 경우 정부나 수사 당국은 공식적으로는 상대의 요구 조건에 전혀 응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처럼 돼 있다. 만일 협상을 하더라도 은밀한 물밑 채널을 통해 '비밀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일관된 원칙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했다. 이라크 파병 강행 방침을 거듭 재확인해 테러단체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드러내놓고 온갖 협상을 시도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협상 시간마저 단축시키고 향후 이들 단체의 협상력만 키워놓는 우를 범한 셈이 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협상문제 전문가는 "테러범이나 인질범들과 협상해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제2, 제3의 인질범들을 키우게 하는 행위"라며 "공개적으로 호들갑스럽게 협상하는 것이 국민 정서와 정치적 이익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인질이나 국익에는 모두 도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납치 단체와 인질의 성격 달랐다=많은 이들이 일본의 피랍자들은 풀려났는데 김선일씨는 풀려나지 못하고 비극을 맞은데 대해 정부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물론 위에서 본 것처럼 정부의 '과오'는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납치 단체와 인질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와 평면적으로만 비교할 일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우선 김씨를 납치한 '알 타우히드지하드(유일신과 성전)'는 알 카에다 산하 정치테러단체로 일본인들을 납치했던 '사라야 알 무자헤딘(전사여단)이라는 무장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또 일본인들은 평화운동을 벌이는 시민운동가들과 그들의 활동을 취재한 기자였다는 점에서 가나무역 직원인 김씨와는 다르다. 특히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이 BBC 등 외신에서 미군 지원(supporting U.S. military) 업체 등으로 묘사됐고 실제로 김씨가 미군에 물건을 배달하다 납치됐다는 점에서 이라크인들에게 다르게 비쳐졌을 가능성이 높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인남식 연구원은 "김씨가 소속된 가나무역이 미군 지원 업체로 소개돼 이라크 과격 분자들 눈에는 가나무역 직원이나 미군이 똑 같은 존재로 비쳐져 이라크인들의 분노를 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교수는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파병방침을 재강조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테러조직이 단순히 몸값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파병 철회라는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내세운 만큼 정부가 이라크 파병 방침을 거듭 확인한 것은 그들의 '결단'을 더욱 촉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by 선대인 2008. 9. 4.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