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펌 랜딩’이란 표현을 알게 된 것은 두 달 전쯤이었다. 7월 7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던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사고 관련 기사에서 발견한 표현이었다. 그 기사는 소프트 랜딩과 하드 랜딩, 그리고 펌 랜딩에 관한 얘기였다.
국내 부동산경기와 관련해 자주 쓰는 용어가 ‘연착륙’과 ‘경착륙’이다. 이 용어는 원래 항공업계에서 쓰는 표현이다. 연착륙, 곧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은 비행기가 천천히 고도를 내리면서 부드럽게 착륙하는 것을 뜻한다. 승객들이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을 때의 충격을 별로 느낄 수 없는 편안한 착륙이다. 반대로 경착륙, 곧 하드 랜딩(hard landing)은 비행기 고도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착륙할 때 비행기가 충격을 크게 받는 것을 뜻한다. 비행기가 경착륙하면 승객들이 큰 진동과 충격으로 놀라고 기체에 상당한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용어들이 한 나라의 경기나 기업 경영상황의 하강 양상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표현으로 쓰인지는 오래됐다. 나도 부동산 거품 해소와 관련해 이들 표현을 자주 썼다. 그런데 연착륙으로도, 경착륙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의도를 압축해서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펌 랜딩이라는 표현을 접하는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펌 랜딩(firm landing)의 펌(firm)은 우리말로는 ‘단단한’, ‘견고한’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펌 랜딩은 한자어로 옮기자면 ‘견착륙(堅着陸)’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공교롭게도 견착륙의 ‘견’자는 연착륙의 ‘연’자와 경착륙의 ‘경’자를 합성해놓은 듯한 발음이어서 우리말로도 그 의미를 잘 전달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연착륙을 가장 이상적인 착륙 방식으로 생각한다. 날씨가 좋고 공항 시설이 양호한 가운데 활주로 길이도 충분하면 부드러운 소프트 랜딩을 선택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하지만 날씨가 나쁘거나 활주로 길이가 짧을 때는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고 한다. 고도를 조금 빠르게 떨어뜨리면서 거칠게 착륙하는 방법이 오히려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어 더 안전한 착륙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펌 랜딩은 바퀴를 활주로에 강하게 부딪치고 타이어의 마찰력으로 최대한 빨리 감속해 활주 거리를 줄이는 것이다. 착륙 조건이 나쁠 때 무리하게 소프트 랜딩을 시도하면 속도가 빨리 줄지 않아서 오히려 미끄러지거나 활주로를 이탈하며 큰 사고를 내기 쉽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부동산 시장에 계속해서 울려왔던 경고 사이렌을 주의 깊게 들어 왔던 분들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 챘을 것이다. 정부와 기득권 언론은 부동산 시장이 경착륙하면 경제 전체에 미치는 충격과 피해가 워낙 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서 이른바 ‘연착륙론’을 내세워 건설업계나 부동산 부자들을 위한 갖가지 부양책을 쏟아내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런 기조 속에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부양책들이 줄을 이었고, 박근혜 정부의 4.1 부동산 종합대책이나 전월세대책으로 포장한 8.28 집값 띄우기대책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그러나 결국 4.1종합대책은 ‘두 달 천하’로 끝났고, 8.28대책 또한 비슷한 궤적을 보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착륙이 불가능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연착륙을 부르짖는 사이 가계부채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늘어났다. 2004년 470조원 정도에 불과했던 가계부채 총액은 올해 2분기 980조원을 기록해 두 배 넘게 늘었다. 올해 4.1종합대책이 나온 뒤 2분기에만 16.9조원의 가계부채가 늘었다. 지난 5년동안 가계부채가 늘어온 속도로 계속 가계부채가 늘면 박근혜정부 임기말인 2017년쯤에는 1218조원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연착륙을 열심히 부르짖었지만, 오히려 길게 보면 경착륙의 가능성을 키운 꼴이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날씨와 활주로 여건으로 볼 때 소프트 랜딩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의 조종간을 쥐고 있는 기장이 공항 위를 선회하면서 여건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또는 기도하고) 있는 꼴이다. 온갖 잔꾀를 부려서 소프트 랜딩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연료는 점점 바닥 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확률은 낮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연착륙은커녕 경착륙을 넘어 불시착(crash landing)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 부동산의 연착륙 기회는 이미 오래 전에 물 건너갔다. 노무현 정권 초기인 2003~2004년 상반기까지가 아마도 연착륙을 시도해볼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노무현정부가 초기의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계속 밀고나가며 착실하게 거품을 빼나갔더라면 지금 같은 위기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재벌계 연구소와 건설업계 산하 연구소 및 금융권 연구소, 그리고 기득권 언론 등을 중심으로 ‘이대로 가면 일본처럼 경착륙할 수 있다’며 부양책을 주문했다. 노무현정부는 주춤했고, 결국 이헌재 재경부-강동성 건교부 장관을 투톱으로 내세워 강력한 건설 및 부동산 부양책을 썼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이름아래 기업도시, 경제자유개발구역 등을 곳곳에 지정했고, 골프장 무더기 증설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한국판 뉴딜’이라며 대규모 토건 사업으로 이뤄진 추경을 편성했다. 이어 서울 강북 집값 띄우기 사업인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뉴타운사업을 한나라당과 손잡고 초당적으로 법제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해서 2005~2006년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2차 폭등이 일어났고, 연착륙 기회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전세계적인 유동성 확대에 따른 자산 거품이 커지는 추세였지만, 노무현정부가 초기의 견결한 자세만 유지했더라도 2~3년 정도만 고생하면 부동산 거품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04년 가계부채 규모가 470조원 수준으로 지금의 절반에 불과했다는 점만 생각해보라.
노무현정부는 부동산 거품을 빼겠다는 의지라도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부동산 거품을 떠받치는데 올인한 정부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부동산 거품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열심히 역주행했다. 2008년 말 일시 빠졌던 집값조차 4대강 사업 등 각종 토건 및 부동산 부양책에 힘입어 2009년 말까지 고공비행했다. 물론 이후에는 대세하락 흐름이 완연해져 온갖 부양책을 퍼부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명박정부 5년 동안에만 공공부채 400조원과 가계부채 290조원 가량이 새로 늘어나 이제는 웬만한 충격을 감수하지 않고는 부동산 거품을 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그런데도 박근혜정부는 예의 ‘연착륙’을 부르짖으며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길을 답습하고 있다. 2013년 1분기 잠시 줄어드는 듯했던 가계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이 4.1부동산 대책으로 2분기에 급증한 것이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
지금 정부는 부동산 연착륙이 불가능한데도, 무리하게 연착륙을 시도하면서 오히려 경착륙 가능성을 키우는 모양새다. 단기적으로는 일정한 충격을 받더라도 지금 국내 부동산 시장은 펌 랜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때다. 그나마 펌 랜딩의 기회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정부와 토건족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부동산이 착륙해야 할 공항의 기상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그나마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는 것도 가계부채라는 아주 위험한 폭탄을 연료로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비상착륙 말고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점점 가까이 몰려오는 경제 참사의 먹구름 앞에서 나는 계속 강한 경고음을 울릴 수밖에 없다. 기적적으로 날씨가 맑아지기를 바라면서 연착륙에만 집착하는 기장만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들이 사태를 직시하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도록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기장에게 ‘더 늦기 전에 펌 랜딩을 시도하라’고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지난 몇 년 사이에 부동산시장과 대중들의 인식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국토교통부, 건설업계-부동산업계, 기득권언론, 부동산 관련 학자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변화가 없다. 그들은 여전히 집값 상승을 염원(?)하며, ‘부동산시장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다져가고 있다. 그리고 계속 정책과 언론을 장악함으로써 나라의 진로를 오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 점점 부동산시장을 장기침체와 경착륙의 수렁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 결과는 결국 그들에게도 좋은 게 아니겠지만, 정말 문제는 대다수 국민들과 이 나라의 미래에도 좋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라도 정책 당국자와 언론, 일반가계가 펌 랜딩이라는 제3의 선택이 현재로선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깨달아주기를 바란다. 그나마 펌 랜딩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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