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난해 대선을 기점으로 삼성 등 재벌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폭되고 있지만 여전히 언론에서는 삼성은 대체로 찬사의 대상이다. 삼성전자 등의 눈부신 실적 등의 영향이 크지만, 나는 대체로 그것이 언론 굴종의 산물이라고 본다. 1999년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불법 상속 문제를 참여연대가 처음 제기했을 때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내가 쓴 관련 기사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 날 나는 그 신문이 파우스트 박사가 영혼을 파는 거래를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문 사주의 아들은 삼성가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그 신문만이 문제인가. 한국의 대다수 언론들이 삼성에게 영혼을 팔아버렸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많다. 예를 들면, 2010년 2월 이건희 회장 발언에 대한 언론 보도다. 당시 이회장은 삼성특검 수사 결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단 하루도 실형을 살지 않고 139일만에 초고속 특별사면을 받았다. 오로지 회장님 한 분 만을 위한 ‘원포인트 특사’였다. 그렇게 특사를 받고 풀려난 지 단 3개월. 그는 이병철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할 소리인가. 그런데도 대다수 언론은 이회장이 ‘화두를 던졌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이런 나라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게 정직이라고 가르칠 수 있나.
보통 이 정도 얘기하면 재벌가인 삼성가와 삼성그룹의 기업들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삼성가의 행태와 무관하게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들의 선전은 평가하자는 얘기인데, 일리는 있다. 하지만 삼성가와 삼성그룹이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나. 쥐꼬리 만한 지분을 가진, 철학자 김상봉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런 법적 실체도 없는 ‘회장님’ 말 한 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재벌체제 속의 기업들이 어떻게 삼성가와 분리돼 움직인다는 건지 나는 잘 상상이 안 된다.
어쨌거나 삼성재벌은 이미 한국경제의 대주주다. 그래서 “그나마 삼성 때문에 먹고사는 것 아니냐” “삼성이 무너지면 한국경제가 무너진다”는 주장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미 삼성에 매수된 언론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이자 프로파간다다. 하지만 대다수가 믿어버리면 진실이 된다. 삼성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어쩌면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돈의 힘에서 파생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동굴의 우상과 동굴 밖 찬란한 태양 아래 놓인 현실은 전혀 다르다. 정확하게 재벌독식 체제 때문에 한국의 산업생태계는 질식해 활력을 잃고 있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구글,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학교 기숙사나 집 안의 주차장에서 시작한 벤처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벤처로 출발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좀 된다 싶은 사업이 보이면 삼성 등 재벌이 인수해버리거나 시장에 들어가서 해당 기업을 고사시켜버리거나, 특허를 가로채기 때문이다.
이건희회장은 “한 명의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한 적 있다. 이회장이 내심하고 싶었던 말은 ‘삼성이 한국을 먹여살린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삼성과 같은 기업들이 온갖 특혜를 누리며 99% 국민을 등쳐서 자신들의 부를 불리고 있는 것에 가깝다. 삼성이 정말 순전히 자신들의 경쟁력만으로 지금과 같은 엄청난 실적을 낸다면 나는 기꺼이 박수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삼성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자원을 싹쓸이하는 상황을 뻔히 보면서 마음 편히 갈채를 보내기는 어렵다. 더 많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 체제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고 협력업체와 소비자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고 있는 현실에서는 말이다.
말 나온 김에 삼성이 누리는 특혜를 몇 가지만 열거해보자. 우선 환율효과. 원달러 환율이 2008년 경제위기 전 900원대 초반이었다가 경제위기 이후 1100~1200원대를 유지해왔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했다는 지난 수십 년 동안 240원대이던 환율이 지속적으로 올라, 즉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삼성전자와 같은 수출대기업들을 도와주면서 성장했다. 수입 인플레로 소비자들은 늘 만성 불가 불안에 시달리면서 수출대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온 셈이다. 요즘 일시적인 엔저로 ‘수출 비상’ 운운하지만 삼성전자 등 수출대기업이 누린 혜택은 엄청나다. 내가 분석해본 결과로는 매 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 가운데 최소 3분의 1가량은 환율효과에 힘입은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이뿐인가. 2012년 예산안 기준으로 16조원이 넘는 R&D 투자의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삼성 등 재벌대기업들이 향유한다. 일부 기득권 언론들이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사실상 조세도피처를 경쟁국으로 비교하며 한국의 법인세율이 높다고 질타하지만 국내 법인세율은 일정한 내수규모를 갖춘 대다수 OECD 국가들보다 낮다. 특히 각종 비과세감면 혜택으로 한국의 재벌대기업들은 중소기업보다 낮은 법인세 부담을 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기업은 삼성전자다. 상대적으로 가계들이 높은 전기요금을 부담하는 대신 낮은 산업용 전기료 부담으로 가장 많은 보조를 받는 것도 삼성이요, 늘 담합을 주도해 거래 업체나 소비자의 정당한 몫을 가로채 가장 많은 부당이득을 취하고도 ‘리니언시’ 제도의 힘을 빌려 가장 많은 과징금 면제혜택을 받는 것도 삼성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내 언론들은 ‘삼성이 한국을 떠날 수 있으니 삼성을 더 잘 모시라’고 떠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우리는 삼성에 엄청나게 몰아줬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잘 살게 되고 더 행복해졌나. 한국경제의 많은 자원을 삼성에 몰아주고, 삼성전자는 모바일부문에 몰아준 결과 한국경제는 당장 경제 포트폴리오 면에서만 봐도 매우 취약해졌다. 외국자본들의 ‘작전’ 논란에도 불구하고 JP모건의 리포트 한 방으로 삼성주가가 무너지고, 한국 증시가 기진맥진하는 이유는 뭔가. 삼성사옥 앞에서 만난 한 삼성 직원은 “그래도 ‘관리의 삼성’이 충분히 잘 관리할 겁니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삼성만을 믿고 살아야 하는 한국경제가 불안하다. 삼성만을 믿고 살아야 하기보다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이 튼튼해 가계가 스스로를 믿고 살 수 있는 경제를 보고 싶다. 내가 아는 삼성 직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사상 최대의 승진 잔치 이면에 사상 최대의 살육(=해고)이 진행되는 회사”가 아니라 협력업체와 직원, 사회공동체와 공존공영하는 ‘착한 회사’가 한국의 대표 기업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삼성에도, 한국 경제에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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