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그동안 재벌 총력지원 체제를 통해 각종 자원을 재벌들에게 몰아주고 이들에게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읍소하거나 압박하는 식의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에 직면해 있고, 자선사업가도 아닌 재벌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할 리 만무하다. 이제는 재벌들은 자체 경쟁력으로 성장하게 하고 재벌들에게 보냈던 자원을 중소기업들에게 돌려야 한다. 특히 중소기업들에 대한 연구개발과 인적자본개발 지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재벌과의 실질적인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해 자생적인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대만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때 개발도상국이었던 싱가포르·대만·한국 등은 이제 고품질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어요. 뒤를 돌아보면 중국이 바싹 그 뒤를 좇고 있죠. 하지만 나는 대만은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만 사람들은 2개의 명함을 가지고 다닙니다. 바로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와 앞으로 설립할 회사의 명함이죠. 그만큼 창업이 쉽고 정부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에 숨을 불어넣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재벌들이 시장을 좌우하고 있고 대만처럼 소규모 창업이 쉽지 않죠. 일본의 뒤를 좇지 않을 것인지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한국 경제의 엔진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선 기업가들이 파괴적인 혁신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앞장서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조선일보 2007년 3월 23일자 ‘경영학의 아인슈타인’ 역발상 경영을 외치다, 기사 중에서)

마이클 포터 이후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을 대표하는 경영 구루라고 할 수 있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의 진단이다. 나는 그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그럴까. AMC와 퀄컴, 애플 등을 주요 고객사로 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주문생산 제조업체인 대만의 TSMC 사례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TSMC는 숱한 첨단기술기업들의 모태가 된 대만의 국책연구진흥기관인 공업기술연구원(ITRI)에서 1987년 떨어져 나와 중소벤처기업으로 설립됐다. 종래 수직적으로 통합돼 있던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선진국들이 반도체 칩 설계와 판매를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반도체 제조공정(fabrication) 없이 하드웨어 장치와 반도체칩의 디자인과 판매에 특화한 반도체 산업 분야)분야에 특화하면서 반도체 제조공정 분야를 아웃소싱할 때 이를 주문받아 급성장해온 회사다. TSMC는 이 같은 시장을 초기에 포착해 끊임없이 기술력을 높여온 결과 2010년 말 기준 시장가치가 70조 원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7년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10여 년 만에 RFWS 무선 칩셋 분야 2위, 전세계 반도체 팹리스 분야 4위를 기록한 미디어텍이라는 회사도 있다. 이 회사는 기술혁신을 거듭해 2001년부터 10년 동안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10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처럼 대만은 TSMC나 미디어텍 외에도 에이서, 아수스, MSI(노트북 및 PC제조 분야)와 UMC (반도체제조분야), HTC(스마트폰), 치멜 이노룩스, AU 옵트로닉스(TFT-LCD 분야) 등 탄탄한 기술력과 혁신능력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우리처럼 재벌기업 계열사이거나 재벌기업을 모태로 하지 않고서도 실력 하나로 성장한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중소벤처기업에서 시작해 10여 년 또는 20여 년 만에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예를 잘 상상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숱핱 재벌 협력업체 등이 있지만 자체적으로 다양한 국내외 거래처를 가지고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활발한 중소기업 산업생태계가 있고 없음의 차이다. 대만은 정부 주도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해왔고 국토가 비교적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하며 경제개발의 출발 시기가 비슷하고 비슷한 발전 단계에 와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비교되는 나라다. 하지만 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한국보다 물가 상승률이 낮고 사회복지 수준이 우리보다 높으며 경기의 진폭이 훨씬 적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점은 경제성장의 핵심 축이 재벌 중심의 한국과는 달리 중소기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중소기업들이 공정한 경쟁 규칙에 따라 치열하게 기술력과 사업모델 혁신을 통해 경쟁한 결과 탄탄하고 안정적 일자리를 만드는 대기업들로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 결과 대만의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 수의 97%를 차지하지만 고용의 77%만 담당하고, 3% 정도인 대기업이 23%나 고용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관계를 만들어 중소기업이 수출의 51%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 수출 비중이 38%에 불과하고 대기업이 62%를 차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구조다.

이렇게 된 데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평적 관계가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의 경우 재벌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흔히 갑을관계로 표현된다. 하지만 말이 갑을 관계이지 최근 남양유업 사태나 편의점주 연쇄 자살 사태에서 봤던 것처럼 실제로 재벌대기업은 쥐 앞의 고양이처럼 ‘수퍼 초강력 울트라 갑’으로 행세한다. 협력업체 기술 탈취와 이들 업체에 대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 판매 물량 떠넘기기 등은 기본이고, 협력업체가 다른 대기업에는 납품할 수 없도록 해 거래관계를 종속적으로 만든다. 이런 식이다 보니 2000~2009년 10년 동안 삼성전자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3.28%인데, 삼성전자 하도급업체는 6.71%로 절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만의 중소기업은 여러 기업체에 동시에 납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만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외국 업체들과 동시에 거래한다. 이러다 보니 이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는 한편 납품 단가와 관련해서도 대등한 협상력을 가진다. “대만의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깊숙이 자리 잡아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상생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결과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매우 전문화되면서도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들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또 이들 중소기업들이 기술력과 자본력을 축적함에 따라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또 하나의 요인은 앞서 언급한 ITRI 등을 통한 대만 정부의 지속적인 R&D 투자라고 할 수 있다. ITRI는 1973년 대만 경제성 산하 국책 연구소로 출범했다. ITRI는 경제성과 민간기업들의 자금을 반반씩 출자 받아 기초 연구개발과 응용과학기술연구를 진행한다. 이들 연구는 중소기업들과 긴밀한 협력 아래 이뤄지면 이렇게 개발된 기술들은 이들 기업에서 활용해 상용화한다. 또 여기에서 연구하던 팀들이 별도 회사를 차려 나가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독립한 업체가 TSMC를 포함해 140여 개가 넘는다. 또한 ITRI가 매년 기업에 이전하는 기술만 700여 건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 ITRI는 또한 인큐베이션센터 등을 활용해 벤처창업 등을 적극 지원하고 루슨트 테크놀로지와 마이크로소프트, MIT 등 첨단 기업 및 대학들과 연구협력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ITRI의 역할이 한국과 크게 다른 것은 일부 대기업이 아닌 주로 중소기업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자금과 연구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한 뒤 여기에서 개발된 기술들을 중소기업이 활용토록 하는 것이다. 한국이 연구개발비 예산의 90%를 최종적으로는 재벌들에게 몰아주는 것과는 상반된다. 이런 식으로 ITRI가 보유한 기술특허만 약 1만개가 넘는데 이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비슷한 숫자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기술특허는 자사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반면 ITRI의 기술특허는 중소기업들에게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최근으로 올수록 대만에서도 대기업이 점점 늘어나고 이들의 매출과 이익 규모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오랫동안 중소기업에서 시작해 기술력을 키워온 업체들이 대기업으로 성정했고, 협력업체들과의 관계도 수평적이어서 동반성장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지금 대만은 노트북, 넷북, 마더보드, 케이블모뎀 등에서 전세계 시장의 90% 가량을 지배하게 됐고, LCD모니터와 LCD TV, LCD패널 등에서도 상당한 시장을 차지하고 한국기업들을 뒤쫓고 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한국은 홈런 치는 거포만 있는 야구단이다. 홈런 타자는 환호를 받지만 다른 선수들은 이 타자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다. 홈런 타자에게는 거액의 연봉과 광고수입이 따라붙지만, 다른 선수들은 박봉에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더구나 홈런타자가 큰 부상을 당하거나 노쇠해지면 그 야구단은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만은 어느 정도 실력 차이는 있지만 타자들이 돌아가며 안타를 치며 득점하는 야구팀이다. 한국의 홈런 타자 한 사람에 집중되는 연봉을 대만 선수들은 골고루 나눠가지며 좋은 팀웍을 유지하며 경기를 치른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대만은 걱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은 걱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경제가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다. 홈런타자도 필요하지만 홈런타자와 함께 돌아가며 안타를 치며 득점에 기여하는 타자들도 필요하다. 이런 타자들을 길러내기 위해 한국정부는 재벌의 독과점적 지위 남용과 불공정 거래를 엄벌하고, 대만처럼 지속적인 혁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쉽게 말해 고질적인 갑을관계를 이번 기회에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재벌들에 몰아준 자원들을 이제는 중소기업들에 지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연구개발 예산의 상당 부분을 중소기업에 배분하고, OECD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인적자원개발 예산을 대폭 늘려 중소기업 인력의 질을 높이고, 마케팅 능력 향상 및 해외 판로 개척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선대인경제연구소(www.sdinomics.com) 99% 1%에 속지 않는 정직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연구소의 연간 구독회원이 되시면 경제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한편 연구소의 정직한 목소리를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by 선대인 2013. 5. 21. 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