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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방영된 KBS 추적60분을 뒤늦게 보았다. 선분양제가 ‘토건족의 거대한 사기판’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정부나 여야 정치권이 내놓을 부동산 정책은 '빚 내서 집 사라' 정책이 아니라 선분양제와 같은 이런 시대착오적 제도를 바로잡는 것이다.
우선, 추적60분의 앞부분을 보면 정말 코미디 같은 장면 나온다. 설계 시방서에 비해 절반으로 철근 시공한 대우건설, 구조상 전혀 문제없다고 딱 잡아뗀다. 그러면 설계는 폼으로 하나? 한 술 더 떠 그걸 제대로 감리하지 않은 감리업체는 대우건설이 잘 할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시공업체가 제대로 잘 하는지 감시하라고 감리제도를 둔 것인데, 시공업체가 잘 할 거라고 믿었다면 감리는 왜 하나? 한국의 건설업체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건축물이 부실하게 지어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사기에 가까운 분양광고를 하고, 각종 하자와 부실 투성이인 건물을 지어대고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바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선분양제 때문이다. 인천 청라신도시나 영종하늘신도시처럼 공공기관이나 건설업체가 약속한 온갖 기반시설 들어서지 않은 채 허허벌판에 아파트만 있다고 생각해 보라. 후분양제 상태라면 그런 곳에 엄청나게 비싼 돈을 누가 들어갔겠는가.
한국 주택시장은 공급자인 건설업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구조인데 그 가운데 주택소비자의 지위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제도가 선분양제다. 몇 천만 원 하는 자동차도 실제 차를 시승해보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수억 짜리 집을 사면서 모델하우스만 보고 사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선분양제는 주택 소비자 입장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완성품을 보지도 않고 사게 하는 제도인 것이다. 선분양제는 민간건설자본이 취약하고 주택 공급은 늘 부족하던 시절에는 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일정하게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택물량이 남아돌고 건설업체들도 과포화 상태인 지금까지 선분양제를 고수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분양후 입주까지 3년 정도 걸리는 선분양제와 이와 짝을 이룬 3~5년 거치식 주택대출은 호황기 때 건설업체와 금융권이 일반가계의 지나친 투기 심리를 부추겨 수분양자들이 무리하게 빚을 내 계약하게 한다. 반면 주택시장 침체가 오면 수분양자들이 고스란히 하우스푸어로 전락하게 된다. 이처럼 부동산 투기거품의 진폭을 키우고 수많은 가계들을 약탈적 금융의 희생자로 만들어 하우스푸어로 만드는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이런 제도를 고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이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친시장정책’이다. 그런데도 기득권언론들에 의해 ‘시장주의자’라고 불리는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같은 시대착오적 제도를 개혁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은 토건족에 유리한 방식으로만 시장을 갖다 붙이는 ‘기득권만능주의자’일 뿐이다.
국토교통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추적60분이 보여줬듯이 인천시와 같은 지자체, 경제자유구역청, 공기업이라는 LH공사 등을 보면 이들은 대다수 가계들 편이 아니라 철저히 건설업체들 편에 서 있다. 무책임한 장밋빛 개발계획을 내놓고, 건설업체들의 사기성 분양광고를 방조하고, 시공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관리감독을 하지 않은 책임을 지는 주체가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렇게 수많은 입주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지만 제도적 개선에 나서거나 책임 있는 답변에 나서는 이들 하나 없다. 오히려 서로 책임을 떠넘기거나 건설업체들이 적당히 무마하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수십 년 동안 공급자인 건설업계와 유착에 건설업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으로 행정이나 사업을 추진해온 관행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분양제는 한국 토건족들이 만든 거대한 사기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 부동산시장의 구조적 문제점이 전적으로 선분양제 때문에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분양제가 부동산시장의 위기를 증폭시키고 주택소비자의 피해를 양산하는 등 경제적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것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업계의 반대와 이를 비호하는 정부와 정치권, 관변학자들의 엉터리 논리에 의해 후분양제 도입은 계속 지연됐다. 외환위기 이후 오래 전에 바뀌었어야 할 제도가 그대로 온존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제도개혁을 제때 하지 않을 때 경제 전체로 얼마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는지를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건설업계와의 유착에 빠져 4.1부동산대책과 같은 임기응변적 처방과 특혜 주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미 숱한 위기와 폐해를 겪고서도 공급자에게 유리한 선분양제에 집착하는 등 제도적 개선은커녕 문제를 일으킨 건설업체와 금융권 등에 대한 선심성 부양책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계속 증폭되는 위기 속에서 일반가계들만 고생하고, 건전한 경제구조의 토대가 허물어질 뿐 경제가 제대로 된 발전을 하기 어렵다. 이런 때일수록 가계를 제물로 삼아 건설업체와 금융권을 배불려온 시대착오적 선분양제 같은 제도 들을 정비해야 할 때다.
하지만 부동산 부자들을 위해 지금의 비정상적인 집값을 떠받치겠다는 일념으로 점철된 4.1부동산대책을 내놓은 현 정부여당에 그런 기대를 해봐야 부질없다. 그렇다면 야당이라도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놔야 한다. 20대의 절반 이상이 월세에 사는 등 야권지지 성향이 강한 30대 이하의 대다수가 세입자 상태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지지층을 위해 임대차보호제도를 획기적으로 강화한다든지, 깡통전세의 세입자의 법적 대항력을 키운다든지, 공공임대주택 확대 공급방안을 내놓는다든지, 시대착오적인 선분양제와 3~5년 거치식 대출구조를 개혁한다든지 하는 차별화되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4.1부동산대책의 적용 대상을 늘리는 등 아무리 많이 잡아도 수혜자가 상위 5~10% 정도에 불과한 부동산부자들을 위해 하우스푸어를 양산하는 대책에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이러고도 민주당을 지지해 달라고? 꿈 깨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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