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산업 흥망 좌우할 제도들


"최저가 낙찰제. 좋습니다. 제도의 의도도 좋고 도입 취지도 좋습니다. 제대로만 시행된다면 국내 건설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문제는 제도 시행에 필요한 여건이 열악하다는 거지요. 국내 업체들, 특히 대형업체들이 최저가 낙찰제 확대를 반대하는 것은 제반여건을 우선 조성해 달라는 게 핵심입니다.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고요. 최저가 낙찰제도 도입 의도는 단순한 낙찰가 하락을 통한 예산절감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저가를 통한 부실업체 퇴출과 건설산업의 건전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도입된 것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한 보조장치는 모두 제거하고 최저가만 도입했으니 시끄러울 수밖에요."(아래 생략)

미디어다음이 개설한 '입찰개혁' 토론방에 31일 '이한상'님이 올린 글의 일부다. 이 네티즌의 지적대로 최저가낙찰제는 기술혁신과 관리 효율화 등을 통한 건설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무조건적인 최저가는 항상 가격 대비 최선의 품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미국 영국 등 건설선진국에서는 최저가낙찰제 공사에서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제도가 함께 갖춰져 있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단순히 입찰제도 만이 아니라 건설제도 전반을 함께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계약이행보증제도 개선과 감리감독의 강화 등은 최저가낙찰제 도입과 직결된 개선책으로 지적돼 왔다. 하지만 정부는 최저가낙찰제뿐만 아니라 이 같은 제도 개선책의 도입에서도 매우 미온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역으로 감리 및 보증제도의 개선 등이 이뤄지지 않아 최저가낙찰제 유보가 불가피하다고 핑계를 댄다. 건설업계도 이 같은 '현실론'을 근거로 최저가낙찰제의 확대시행에 반발하고 있다.감리와 보증제도 개혁 등 최저가낙찰제를 도입하기 위한 관련 제도의 실태와 개선 방향을 알아보자.

복잡한 중간단계 거쳐 예정가의 절반 이하에 공사
중간단계 줄이는 제도 개선해야






지하철 공사 후 2개월여만에 다시 파헤쳐지는 대정 중구의 한 도로. 팠던 도로를 몇 번이나 새로 파는 식으로는 대한민국이 '건설선진국'이 되는 길은 요원하다.[사진제공=연합뉴스]

▲건설업역 철폐 통한 중간단계 축소=

우리 건설산업은 일반건설업과 전문 건설업, 시공과 설계업 등으로 업역이 구분돼 있다. 과거 일본의 방식을 본따 업역별로 일정한 영역과 수익을 확보해주기 위해 마련된 구조다. 미국 등의 경우 업역 구분이 없어 건설회사가 설계와 건설사업관리, 시공을 총괄하므로 정부 공사를 수주한 업체가 직접 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옷 만드는데 디자인 따로, 재봉 따로, 품질검사 따로인 반면 건설선진국은 이를 통합해서 진행하는 셈이다.

이처럼 건설선진국에는 없는 업역 구분이 복잡한 중간단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부 발주 공사의 경우 일반건설업-전문건설업-시공참여자-십장-반장-현장 근로자로 이어지는 복잡한 '중간단계'를 형성한다. 일반건설업체만이 정부 공사를 수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건설업체의 수주가 4~5단계에 이르는 긴 중간단계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행 적격심사제는 중간단계 업체들이 모두 먹고 살 수 있는 '덤'을 얹어주는 셈이다. 거꾸로 최저가낙찰제는 이 같은 중간단계 마진들을 줄이게 되므로 전문건설업이나 시공참여자 등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저가낙찰제를 시행할 경우 가뜩이나 월급이나 복리후생이 열악한 이들 업체 종사자들의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기 때문.

특히 요행에 따라 공사를 따는 '운찰제'로 변질된 적격심사제 하에서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양산된 '페이퍼 컴퍼니'가 건설업의 유통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실제로 96년 3000개 가량에 불과했던 일반 건설업체 수가 지난 해 말까지 5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기간 공사 물량은 크게 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업역제한을 풀고 최저가낙찰제 등 시장경쟁 원리를 도입해 복잡한 중간단계를 줄이는 등 업계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물론 과도기적으로 폐업하거나 경영난을 겪는 업체들이 적지 않겠지만 '거품'을 빼서 절약되는 매년 수조원의 예산을 건설공사로 돌리면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보증시장 개방하고 보증한도 높여야

▲품셈 제도 폐지=

정부 발주 공사의 경우, 예정가가 크게 부풀려져 있어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실제로는 40%대에 공사가 진행된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복잡한 '중간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정부공사를 수주한 일반 건설업체는 이익을 보는 반면 최종 시공업체들은 예정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원가에 시공하고 있는 셈이다.이처럼 원가가 낮아지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예정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예정가격이 부풀려 지고 있는 데는 '품셈제도'란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로 공사비를 계산하고 있기 때문으로 지적된다.품셈이란 인건비, 자재비, 장비값 등 건설공사비를 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정부 발주공사는 품셈에 의해 예정가격이 산출된다. 문제는 품셈을 정부가 아닌 건설업체에서 운영함으로써 공정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데 있다.건교부에서도 이러한 품셈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해 87년부터 실제 공사가 진행된 것을 기준으로 공사비를 산정하는 '실적공사비 적산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뒤 그동안 수십 차례 도입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수십 억원을 들여 7~8년간에 걸쳐 관련 연구용역을 실시하기도 했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그 도입을 미루고 있다.
 
▲공사이행보증제도 개선=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서는 이행보증시장을 개방하고 보증한도를 크게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진국의 경우 건설공사와 관련된 보증을 건설업체의 주거래은행이 담당한다. 발주기관은 주거래은행의 보증을 요구함으로써 주거래은행조차 보증하지 않는 부실한 건설회사는 입찰참가부터 못하도록 하고 있다.이 때문에 해외공사의 경우 국내 시중은행도 신뢰를 얻지 못해 산업은행 등을 통해 국가가 보증을 해줘야 국내 건설업체가 입찰에 나설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대건설의 부실을 정부가 떠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선진국의 이행보증제도가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고 있다.하지만 우리나라 건설보증시장은 건설공제조합이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특히 건설공제조합이 조합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의 보증을 자체적으로 하는 모순점도 있다. 또한 이들 기관에서 보증하고 있는 보증비율은 10~30% 내외로 부실시공에 대한 보증 자체가 당초부터 어려운 실정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보증비율이 100~150%에 이른다. 따라서 공사이행보증의 현실화를 위해 공사비 대비 보증 비율을 대폭 높여 부실시공에 대한 직접적인 하자보수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또 보증기관도 시중은행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시중은행들은 대부분 상장돼 있는 대형 건설업체들의 재무상태를 알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보증을 맡길 경우 보증의 신뢰성이 크게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재경부도 이 같은 보증제도의 개선 필요성을 알고 있지만 가시적인 조치는 여전히 뒤로 미루고 있다.

감리, 전문가로 대우하고 실질적 권한 줘야
설계변경 통한 공사비 증액 제한해야


▲감리 강화=

최저가낙찰제를 시행할 경우 일부에서는 부실시공이 이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감리를 철저히 하면 부실시공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행주대교와 성수대교 등 대형 사고 이후인 93년 책임 감리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법이나 시행령에서 규정한 감리원의 권한을 감리업무시행지침 등을 통해 공무원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특히 설계변경과 기성 등 돈과 관련한 권한을 공무원들은 그대로 틀어쥐고 있는 셈. 이처럼 감리원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 보니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낮은 편이다. 또한 감리들이 문제를 지적해도 이를 그대로 시정하는 경우도 드물고 시공사와의 '유착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이 같은 문제점을 줄이기 위해 2001년부터 감리 비용을 늘이고 감리원의 권한을 강화하도록 법을 개정했으나 이를 어길 경우의 처벌조항 등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 상태다. 특히 4~5년 전부터 공무원 출신 감리단장이 우대받는 제도가 생겨 전현직 공무원간의 '유착관계'가 감리의 부실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은 감리원을 전문가로서 대우하고 강한 권한을 주되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설계변경의 제한=


최저가낙찰제 하에서 낙찰율은 점점 떨어져 지난 해의 경우 49%정도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낙찰율을 통해서도 이윤을 보는 건설기업이 적지 않지만 적자를 감수하고서도 공사 물량을 확보하거나 실적을 쌓으려는 업체들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상당수 건설업체들은 이처럼 낮은 낙찰율을 이후 설계변경 등을 통한 공사비 증액이나 부실시공 등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같은 공사비 증액을 위해 의도된 설계 변경이나 부실시공을 눈 감아주는 감독관청이 있다는 얘기다.따라서 전문가들은 덤핑 수주로 시행하는 공사는 반드시 손해 본다는 기본 원칙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일정 낙찰율 이하의 금액으로 낙찰받은 공사에 대해서는 설계변경 조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법 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 부실시공 등을 눈 감아주는 조건으로 '뒷돈'을 챙기는 공무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by 선대인 2008. 9. 4.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