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인 대선 후보가 어제 노무현정부가 재벌개혁에 실패한데 대해 “참여정부의 역량 부족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번 실패는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재벌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여러 방안들이 발표됐기에 각론 하나하나에 대해 세세히 평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대체로 이 방안들만 잘 실천해도 재벌들의 횡포와 경제력 집중을 상당히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구심이 가라앉지 않는 부분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재벌이나 건설업계와 유착했거나 그들에게 휘둘렸던 고위 전직 관료들이 자문단에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문후보가 정말 재벌개혁을 제대로 하겠다면 이 같은 전직 관료들을 과감히 내쳐야 한다. 이건 꼭 문후보뿐만 아니라 안철수후보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내가 진행에 참여하는 ‘나꼽살’ 방송을 통해 그동안 기성 언론에는 잘 등장하지 않았던 모피아와 토건마피아(또는 토건족)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모피아란 기획재정부나 그 전신인 재정경제부 출신 경제관료들이 현직에 있을 때나 퇴임 후 ‘낙하산’이나 정치인 등으로 변신해 재벌업계 및 금융기관 등과 유착해 이들에게 유리한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부의 영문 머릿글자인 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의 합성어라고 보면 된다. 토건마피아는 모피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건설 및 부동산업계와 유착해 불요불급한 토건개발사업을 벌이는 국토해양부 출신 관료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무능하고 부패하며 시대착오적인 관료 체제의 핵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때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서 칭송받던 한국 관료체제가 왜 이렇게 됐을까. 사실 지금도 한국의 관료들 개개인은 똑똑하다. 하지만 시스템으로서는 매우 무능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알다시피 한국 관료 시스템은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고시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이런 고시체제는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과 표준화된 대량생산방식이 주가 되던 시대에는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시체제는 기술집약적인 경제패러다임과 지식정보화 및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지속적 혁신이 강조되는 시대를 이끌어가기에는 부적합한 체제다. 더구나 민간 부문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문화되고 있는데, 고시체제로는 민간 부문의 전문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물론 개발연대 초기에는 관 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면서 정책 집행권과 자원 배분권을 가진 관료들의 힘이 막강했고 그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력들이 관료로 몰렸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민간의 수준이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관료들은 큰 틀에서 과거 개발연대의 경제정책과 관행의 틀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개발연대 시절 독재 권력에 굴종하며 스스로 정책을 창의적으로 기획하고 집행하는 구조를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성을 키우기보다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사후 평가나 책임 소재를 따지지 않고 군대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정책을 집행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를 지탱해온 것이 고시 기수에 따른 서열식 승진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고시체제 하의 관료들에게 나타나는 전문성 부족은 결국 외환위기 이후 급속한 환경 변화에 노출되면서 잇따라 문제가 되었다. 김영삼정부 당시 급변하는 경제성장 패러다임에 대응하지 못한 채 외환위기를 맞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시절 카드 빚 사태와 부동산 거품을 일으킨 것이 대표적이다.
관료들의 전문성 부족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관료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이익집단’이라고 할 정도로 스스로 강력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사실상 ‘관료 독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 대다수의 진정한 뜻과는 동떨어진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게 된다. 국민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한-미 FTA의 추진 과정부터 국회 비준까지 국회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 그룹과 국민들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됐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 사실상 김현종 전 외교통상교섭본부장 등 통상 관료들과 이들의 판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만이 진로를 좌우했을 뿐이다. 미국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라고는 하지만 입법부의 민주적 통제 권한과 전통이 취약한 한국의 경우 ‘관료 독재’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국회에서 통과되는 법안과 예산안의 95%는 결국 행정부에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사실상 제대로 견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미 FTA는 최근 국민의 눈에 도드라진 사례일 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국내 관료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이 관주도 경제성장을 추진해오면서 막대한 권한을 배경으로 재벌 기업 및 토건산업 등과 유착해왔다. 이들은 퇴직 후 산하 공기업 또는 민간 기업에 취업한 뒤 몇 년간 연봉 수억 원씩을 챙기며 현직에 있을 당시의 상대적 박봉을 일거에 만회한다.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 등 경제 관련 부처 국장의 2~3년 후 직장이 산업은행이나 기업은행 등 산하 금융기관이나 개발공기업, 각종 관련 재벌 기업, 금융업협회나 건설업협회 등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들이 이해관계에 초연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더구나 이미 그들의 숱한 선배와 동료들이 그들 산하 공기업이나 관련 기업들에 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결국 그들이 겉으로는 국민과 서민을 외치면서도 늘 그들의 ‘1차 고객’인 금융기관, 건설업계, 정유업계, 정보통신업계 등 공급자들을, 그것도 대기업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정책을 펼쳐온 것도 바로 자신들의 밥그릇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각종 부동산 정책은 장기적 관점에서 주택 소비자인 국민들을 위하기보다는 늘 건설 및 부동산 부양책 위주로 집행되어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민간건설업체의 미분양 물량을 세금으로 매입해주고 다주택투기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며 건설업체들이 폭리를 취하게 하는 선분양제와 아파트 전매 같은 정책들을 허용해온 것이다. 또한 카드 빚 사태를 초래한 각종 재벌계 카드사들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구제해준 반면 수백만 명의 저소득층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에 편승한 무분별한 대출 관행을 방조하고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해서라면 DTI 규제와 같은 금융소비자 보호 제도조차 허무는 것도 바로 그런 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인천공항철도 등 수많은 민자 사업을 재벌 건설업체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주고 막대한 적자를 세금으로 메우는 것도 이 같은 유착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시대착오적인 정부조직과 관료 시스템이 연명하기 위해 계속 시대적 소명이 다한 사업들을 끊임없이 확대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들의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각종 정책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유령 공항과 텅 빈 도로 등 사업성이 없는 온갖 개발 사업들을 곳곳에서 목도할 수밖에 없다. LH공사나 수자원공사 등 시대적 소명을 다한 공기업들이 막대한 공공 부채를 쌓아놓고 막가파식 토건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국민경제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모피아와 토건마피아로 상징되는 시대착오적인 관료 시스템을 혁파하지 않으면 국민경제 전체를 위한 건전한 경제정책 수립은 불가능하다. 이제라도 이들 낡은 관료 시스템을 혁파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대선 후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들은 바로 모피아와 토건족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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