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필자는 한때 신문기자였다. 그것도 이른바 ‘족벌신문’으로 불리는 한 신문사의 기자였다. 입사 때는 필자도 ‘정의의 필봉’을 휘두르겠다는 푸르른 열정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언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은 고사하고 언젠가부터 필자의 뇌수가 녹아 내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압사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황급히 탈출한 것이 2002년 5월. 입사 6년만이었다. 그 뒤로 필자는 지금은 없어진 미디어다음 취재팀에서 일하며 신문산업 밖에서 미디어 환경의 급변을 지켜봤다. 또 지금은 저자로서, 취재원으로서 많은 언론 종사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러하기에 필자는 한국 언론의 구조적 병폐와 문제점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부동산 문제에 천착하게 된 한 계기도 부동산 광고를 매개로 한 한국 언론의 낯뜨거운 선동보도를 정화해보겠다는 일종의 소명의식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는 글을 쓰면서 부동산 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사회경제 정책에 관해 기존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이른바 ‘부동산 찌라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저질 경제신문과 조선일보 등 일부 기득권 신문들의 선동보도 또는 왜곡보도는 말할 것도 없다. 경향이나 한겨레, 문화방송 등의 기사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직설적인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가 지난해 출간했던 <위험한 경제학>에서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가 여론을 어떻게 비틀고 소비자로서 일반 가계의 오판을 유도하는지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보통 취재원들은 향후 언론 노출을 위해서라도 언론에 대한 정면 비판은 피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필자의 태도가 불쾌하거나 적잖이 당혹스러운 언론인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언제까지는 한솥밥 먹던 기자 출신이니 더더욱 그런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필자는 못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동산 전문가’로 분류되는데, 대부분의 ‘부동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얼굴 한 번 더 비치고, 신문에 이름 한 번 더 내는 것에 목을 매는 경우와 대비되니 ‘오만하게’까지 비치는 모양이다. 필자는 현 정부의 막무가내식 부동산 부양책에 대해서도 매우 강하게 비판하는 편이라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언론에서는 필자를 기피하거나 틈만 나면 공격하려는 기세가 역력하다.
필자도 그런 언론사의 기피증이나 불쾌함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한국 언론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건강한 긴장관계’라고 믿고 있다. 언론이 그 정도 긴장관계가 부담스럽다면 거꾸로 한국 언론이 취재원과 얼마나 유착돼 있는지, 또는 한국의 언론인들이 얼마나 편하게 기자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물론 필자는 강하게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올바른 보도를 하는 언론에 대해서는 칭찬과 호평을 아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전반적으로 칭찬할 일보다는 비판할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시간과 여력이 안돼 그냥 지나갔을 뿐 비판해야 할 언론 보도는 매우 많다. 한국 언론은 왜곡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영하듯 매우 일그러져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 같은 필자의 판단은 필자만의 착각은 아닌 듯 하다. 대중과 언론학자들을 막론하고 방송과 신문 등 기존 매체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불신은 실제로 구독률이나 열독률, 시청률이나 신뢰도 저하 등 각종 지표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한국 언론이 얼마나 몰상식하며 이해관계에 오염된 보도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언론의 왜곡보도를 꿰뚫어보는 방법에 관한 별도의 책을 쓰고 싶은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급한 주제들에 밀려 선뜻 그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그런 급한 마음을 달래주듯 추천하고 싶은 책 한 권이 출간됐다. <
최기자는 각 장을 한국 언론의 몰상식과 워렌 버핏의 상식을 대비해가며 한국 언론이 얼마나 상식과 정도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 인생을 산, 그래서 세상의 그 누구도 빨갱이라고는 하지 못할 세계 최고의 자본가의 상식과 철학을 통해 우리 사회 언론의 가치관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대비 효과를 노린 구성인 셈인데, 이런 시도는 실패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언론이 가장 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고, 대중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영역이 경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효과적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선 ‘국익’이나 ‘중립’ 또는 ‘객관’이라는 미명 아래 언론이 어떻게 사회경제적 강자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는 지를 분석한다.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하면 그 실체가 설령 ‘대운하’라고 할지라도 언론은 이를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부릅니다. 정부가 자신들을 ‘실용정부’라고 칭하면 설명 그 본질이 ‘권위주의적 기득권 옹호집단’에 가깝더라도 언론은 그저 ‘실용정부’라고 표기합니다. 한국의 주류 언론에서 재벌이라는 말 대신 대기업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된 것도 한국의 재벌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고 또 그 언론이 그 요구에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왜 ‘대량해고’ 또는 ‘대량감원’ ‘대규모 실직’이라는 단어 대신 ‘구조조정’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왜 ‘근로자, 노동자, 또는 직장인’이라는 용어들 가운데 파업할 때만 왜 ‘노동자’라는 표현을 써서 ‘좌경’과 ‘집단이기’를 덧칠하는 행태도 따끔하게 꼬집는다. 또한 극소수 종합부동산세 대상자들에게 부과되는 종부세에 대해 ‘세금 폭탄’이라고 표현한 기득권 신문들이 ‘서민경제파탄’이라고 매일 노래하던 기득권 신문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훨씬 더 심각해진 상황에서도 입을 다무는 편파적 행태도 비판한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보금자리 주택’을 ‘반값 아파트’ ‘친서민 주택정책’라고 선전하는 국토부의 주장을 언론이 그대로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기존의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줄이고, 최소 3,4억씩 가는 분양용, 투자용 주택을 마구 지어대는, 그리고 주변 집값이 지나치게 높은 강남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미 ‘시세수준 아파트’를 그대로 사용하는 기자들은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가.
책 내용 가운데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9년 미국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 수상자인 <뉴욕타임스> 데이빗 바스토우 기자의 ‘TV애널리스트의 이면, 국방부의 검은 손’에 관한 소개. 바스토우기자는 TV에 객관적인 군사평론가로 소개되는 퇴역 장성 수십여명이 사실은 이라크전으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군수산업체의 임원이거나 하청업체 사장, 또는 로비스트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한다. 바스토우 기자는 또한 이들이 CNN, MSNBC, FOX 등 미국의 케이블 뉴스 채널에 등장해 이라크전을 옹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지원한 곳이 다름 아닌 미국 국방부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최기자는 “바스토우 기자의 탐사보도는 TV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객관적 논리’ 속에 사실은 그들의 ‘사적 이익’ 교묘하게 숨겨져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의 신문이나 TV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어떻습니까?(중략)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민간 부동산컨설팅 업체의 임직원들은 모두 부동산 업황의 이해당사자들입니다. TV 또는 신문에 등장하는 상당수 부동산 관련학 교수들도 간접적으로 시행사 또는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 연관돼 잇습니다. 심지어 언론에 등장하는 부동산 관련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직접 부동산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거나 심지어는 땅장사, 빌딩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003년 <특별기획 한국 사회를 말한다>를 만들면서 부동산 시장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소재의 명문대학 교수 3,4명이 주요 주주로 참여한 한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서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은밀히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중략)
‘객관적 전문가’ 또는 ‘학자나 교수’로 공공 매체인 언론에 등장할 때는 최소한 자신들의 현재 부동산 투자 사업과 컨설팅을 부업 또는 본업으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또 언론은 전문가를 필진이나 토론 패널로 쓰기 전에, 이력을 철저히 검증해서 곡 ‘제2의 명함’을 독자와 시청자에게 공지해야 할 의무가 잇습니다. 독자나 시청자는 ‘제2의 명함’을 통해 그 ‘전문가나 교수’가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그들의 말을 가감해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론이 독자라 시청자에게 하는 공익적 서비스입니다.”
평소 필자의 문제의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지적이다. 필자는 그동안 기자나 PD,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들에게 최기자가 주장한 내용을 숱하게 요청해왔다. 적어도 건설업계에서 설립한 건설산업연구원이나 주택산업연구원 같은 단체들 앞에 ‘대한건설협회 부설’ ‘대한주택협회 부설’과 같은 수식어만 달아줘도 사람들의 판단은 일정하게 달라질 것이다. 이들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건설업계의 이익을 대변할 것임은 너무나도 뻔한데도 각종 TV토론이나 기사 등에서는 마치 이들을 ‘객관적인 전문가’인 양 포장하고 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알면서도 그런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정말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하기는 부동산 광고를 매개로 해 부동산 경기를 살리고 자신들의 주독자층인 ‘부동산 부자’들에게 영합하는 기사를 써야 하는 ‘찌라시 신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아파트 분양광고에 민감할 이유가 없는 방송이나 일부 신문조차 똑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는 이해관계를 떠나 ‘문제의식의 마비현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정론지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와 같은 역할을 이 나라의 주류 언론이라는 조중동이 해줄 것이라고는 당초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그 같은 역할을 일부 해주던 프로그램들이 MBC의 <PD수첩>이나 KBS의 일부 시사프로그램이었다. 특히 2년 여전 KBS 시사기획 쌈에서는 이들 부동산 관련 학과 교수들이나 부동산정보업체 종사자, 건설산업연구원 등 건설족들의 이데올로그들의 이해관계와 정부-언론의 유착관계를 파헤친 적이 있다. 하지만 현 정부의 방송장악이 본격화한 이후 시사기획 쌈은 시사기획 텐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그다지 의미 있는 방송을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이미 부동산 시장의 대세가 기울었고, 계속 “집값이 오르니 집을 사라”고 했던 ‘부동산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객관적인 전문가’로서 우리의 TV화면과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심지어 현 정부 인수위 당시 인수위에서 취득한 정보를 자신의 부동산 컨설팅 영업에 이용해 검찰조사를 받는 등 물의를 빚었던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자. 최기자의 비판은 이어진다. “한국의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에게파업은 항상 국가경제에 치명타이지만, ‘구조조정’ 즉 대량해고는 기업의 회생과 국가경제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을 하면 주가가 오르지만 반면 파업을 하면 일주일에 손실액이 수조원에 이르러 국가 경제에 심각한 내상을 입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그러나 삼성과 현대그룹의 총수
‘부정과 부패, 배임과 탈세 그리고 반칙과 위선’의 결정체들을 옹호하는 이른바 전문가와 상당수 언론들의 몰상식에 비해 워렌 버핏의 상식은 어떤가. 워렌 버핏은 “2003년 버크셔 헤더웨이의 주주들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을 통해 회사가 내는 세금의 액수가 지난 수십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 해 버크셔 헤더웨이가 낸 세금 33억 달러(약 4조원)는 그해 기준 미국 전체 기업이 연방정부에 낸 법인세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최기자의 말마따나 “자신의 자녀를 자신의 부동산 회사의 관리원으로 위장 취업시키는 수법으로 탈세를 했던 한국의 대통령이나, 그 대통령으로부터 계획적으로 수조원을 탈루한 악질적 범죄를 말끔히 사면받은 한국의 재벌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벅찬 ‘기이한’ 정신세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언론들이 상식과 정도를 벗어나 기득권 위주의 보도를 지속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최기자는 “그 책임의 대부분이 기자 생활을 30년 넘게 한 50대 중반 이상의 언론인들에게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최기자의 이 같은 주장은 주로 KBS 내부 사정을 특히 감안한 주장으로 여겨지지만, 대부분 언론에서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구시대적인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젊은 기자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필자가 다녔던 신문사에만 국한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일부 군소 신문사에서는 기사를 광고와 ‘엿 바꿔 먹고’ 기자들에게 사실상 기사를 매개로 한 ‘광고 영업’을 주문하는데, 이런 신문사의 기자들이 무슨 사명의식과 프로페셔널리즘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KBS 내부의 사정은 조금 더 다르고, 심한 것 같다. “한국은 ‘중견언론인’일수록, 도는 ‘중견언론인’이 돼갈수록 오히려 그 수준이 더 떨어집니다. (중략) 이분들은 초년병 시절에는 출입처에서 ‘받아쓰기’에 집중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나이 마흔이 넘어서는 데스크나 부장으로 들어앉았습니다. 그래서 특히 정치나 경제적 현안을 독립적, 비판적으로 기획하고 취재해서 보도했던 경험이 일천합니다. (중략) 독립적 취재를 못하다 보니 정부가 기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써서 보도하는 것이 이분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이처럼 ‘받아쓰기 저널리즘’에 젖어 있다 보니 이들 중견 언론인들의 상당수는 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탐사보도나 PD저널리즘이 거꾸로 객관 보도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나 기업의 보도자료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보도물을 기획하는 것은 젊은 PD나 기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기에 방송용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기자는 묻는다. “청와대나 삼성도, 시민도, 단지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신뢰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최기자는 따라서 “언론은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방송기자들은 이 언론의 본 역할을 거의 방기해왔다고 비판한다.
이들 중견언론인들에 대한 최기자의 비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KBS나 MBC에는 현재의 50,60대 방송 언론인들이 1970~80년대 이후 어떤 보도를, 어떻게 해왔는지 증명하는 많은 자료 테이프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두 방송사 모두 이들 자료를 디지털화하는데 매우 미온적이라는 것. “그들이 진행했던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파렴치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최기자의 해석이다.
“과거, 정권의 ‘감시견’이기는커녕 ‘애완견’들이었던 이 50, 60대 방송인들이 우리 언론에 끼치는 가장 큰 악영향은 이분들의 과거가 아닙니다.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마치 자신들은 언론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양 과거를 오도하는 현재의 작태입니다. 또 과거를 오도하기 위해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를 왜곡하고 이를 젊은 기자들에게 주입시키면서 발생하는 현장의 폐단들입니다.(중략) 꼿꼿한 딸깍발이 선비와 같은 언론인은 1970~80년대에 대부분 쫓겨나거나 스스로 직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조직에 순응한 기자들이 언론사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언론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과 다를 바 없게 됐습니다. 기자가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공무원이나 여당 정치인과 비슷한 사고를 하고 비슷한 언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기자는 중견 언론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과잉 상업주의’로 인해 한국 언론의 뉴스가 점점 ‘좁고, 얕고, 얇고, 시끄럽고, 편파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업주의 언론이 판치는 곳에서 언론이 집중하는 것은 양질의 정보 제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분20여초, 불과 8~9문장과 인터뷰 1,2개로 구성된 방송 리포트에서 여러분은 과연 무슨 정보를 얻습니까? 쓰는 사람도 내 기사에는 정말 정보가 없다고 여길 때가 많은데,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무슨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신문은 방송 뉴스처럼 ‘팔릴 만한’ 동영상을 사용할 수 없으니 언어로 분탕질을 합니다. 격한 용어와 선정적인 편집으로 독자를 현혹합니다.”
‘권력과 기업을 대변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처럼 이해관계에 깊이 오염된 언론 보도로 인한 대중들의 피해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짚고 있다. 한국 언론기자들이 증시상황을 보도할 때 몇몇 애널리스트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피상적 분석을 짜깁기한 뉴스를 통해 대중들 사이에서 ‘사실’로 굳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자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중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기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최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값싼 뉴스’를 통해 대중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란 거의 없다며 한국 언론의 날탕식,
‘백인남성 교수’에게 약하고, 정치부나 경제부든 이른바 권력과 돈 있는 출입처를 선호하는 행태를 근거로 권력에 굴종하는 순치된 언론인들의 자화상을 비판한다. 특히 ‘비용을 절감하려는 언론사 사주의 이해관계와 쉽게 일하려는 기자들의 비(非)프로페셔널리즘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지점’으로서 출입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한다. “많은 취재 시간, 인적 사원, 그리고 돈이 들지 않으면 권력을 감시하는 ‘비싼 뉴스’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회의 기득권과 ‘등을 지는’ 행위에는 유무형의 압력도 뒤따릅니다.” 삼성X파일 사건을 비롯해 최근까지 한국 언론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뉴스가 해당 출입처 기자들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필자가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부동산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가 국토해양부에 적을 두고 건설업체들과 부동산정보업체들을 주요 취재원으로 삼는 ‘부동산 담당 기자들’을 만나보면 이른바 ‘건설족들의 논리’와 ‘부동산을 재테크 차원에서 보는 시각’에 절어 있음을 많이 느낀다. 그나마 금융기관, 한국은행, 금융위 등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현재의 부동산 문제가 ‘경제위기’에 관한 문제임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출입처의 자장이 얼마나 강한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부동산 담당기자들의 사례가 아닌가 한다.
서평이 너무 길어졌다. 결코 두껍지 않은 이 책 내용 가운데 소개할 내용은 더 많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줄여야 할 것 같다. 너무 자세히 소개하면 독자들이 이 책을 사보려는 유인이 떨어질 것이므로. 끝으로 한 구절만 소개하고 서평을 맺고자 한다.
“멍청하거나 사악한 언론인이 많을수록 대중은 점점 더 가난하고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하는 짓을 스스로 멈출 거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들은 대중이 계속 그렇게 우매한 상태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이익입니다.”
선대인 트위터 http://twitter.com/kennedian3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