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중수 OECD대사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후임으로 내정됐다. 얼마 전 기획재정부가 한은의 금통위에 참석해 정부 입장을 설명(?)하는 열석발언권을 행사하겠다고 해 한은의 정치적 독립 논란이 일었다.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수준의 경기회복과 물가 인상 압력에 따른 기준금리 인상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잇따르는데 대한 정부의 한은 압박용 카드로 인식됐다.

 

그런데 이제 현 정권은 후임 한은총재 내정을 통해 이제 직접 통치에 나서게 된 것 같다.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김내정자의 내정 직후 첫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첫 발언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은행이) 정치적으로 독립한다는 표현은 맞지만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라며 국가운영의 책임자인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또는 중앙은행 정치적 독립성의 의미를 깔아뭉개고서라도 현 정권에 충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궤변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은의 정치적 독립은 바로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에서 정치적 판단이나 이해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정권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제를 채택한 한국에서 한은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빼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은 바로 정치적 독립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그런데도 김내정자는 이 같은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이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과 한은의 정치적 독립이 마치 별개인 것처럼 황당무궤한 발언을 한 것이다.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사실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그런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정부와 중앙은행간에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적 책임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다수당에 의해 운영된다. 따라서 정부는 정책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비해 중앙은행은 정권획득을 목적으로 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니는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경제상황에 대해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나타낼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정책적 독립성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한 미국의 사례를 한 번 생각해보자. 지난해 초 오바마정부는 5,000-1조 달러의 관민공동펀드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안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미 재무성과 연방준비이사회(FRB)는 상호간에 FRB의 정책적 독립성을 확인하는 4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이 합의문은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미 재무성과 FRB간에 중앙은행으로서의 FRB의 독립성과 건전성에 대한 매우 중요한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합의문 서두에서 FRB는 금융시장 안정에 대한 책무와 더불어 물가안정과 실업 억제를 목표로 하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받는다고 명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 재무성과 FRB는 이 합의문에서 다음과 같은 4개항의 원칙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고 발표했다.

 

첫째, 단기금융시장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미 재무성과 FRB는 상호 협력한다.

 

둘째, FRB는 미 재무성이 실시하는 구제금융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용위험과 구제금융 책임을 떠안아서는 안 된다. 즉 부실금융기관에 대한 구제금융의 책임은 미 재무성에 있으며 미 재무성의 구제금융 과정에서 FRB가 대량의 부실자산을 떠안아 FRB마저 신용위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실금융기관 구제금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미 정부가 져야 하며 중앙은행인 FRB가 그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셋째, 미 재무성의 구제금융을 위해 FRB 고유의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FRB 통화정책의 본연의 책무는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 재무성의 과도한 구제금융으로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에 심각한 불안을 야기할 경우 FRB의 통화정책은 본연의 책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넷째, 미 재무성과 FRB는 금융시스템 실패를 방지하는 대책 마련에 있어서 미의회에 대해 양자가 포괄적인 공동책임을 진다.

 

이상의 합의문은 정부와 중앙은행 간의 정치적 책임과 정책적 독립성 영역을 재차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과도한 구제금융 과정에서 중앙은행에 부실자산 등을 떠안기거나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한 무리한 양적 통화확대로 대차대조표가 부실화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중앙은행이 그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중앙은행에게 정치적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며 그 경우에만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고 중앙은행은 본연의 책무인 물가안정과 고용 안정에 대해서만 정책적 책임을 질 뿐이라는 것이다. 합의문이 최대 1조 달러의 오바마정부 금융안정화대책과 동시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왜 미국에서 이 같은 합의문을 체결했을까. 그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어떤 이유로든 훼손됐을 때 어떤 막대한 폐해가 뒤따랐는지, 미국 사회가 똑똑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실제 국민들의 삶과는 상당히 유리된 지표상의 수치를 통해 자신들의 성과를 과시하겠다는 정치적 탐욕에 빠져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지나치게 우선하는 경제정책들을 남발할수록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을 기본책무로 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당하기 쉽다.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정치적 책임을 우선하는 정부의 폭주를 견제하는 일종의 자동안정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동안정화 장치가 무력화되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서브프라임론 사태로 촉발된 미국경제의 위기는 부시정부 때에 이런 오류를 범한 결과에 기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내정자의 발언은 매우 우려스럽다. 김내정자는 한은도 정부라고 말하고 이를  정책공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그 같은 인식이 바로 한은의 정치적 독립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인식이 바로 가뜩이나 경제위기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경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아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제대로 확보된 선진국에서 중앙은행 총재 내정자가 이런 식의 발언을 했다면 중앙은행 내정자로서 기본적인 자격이 없다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일부 언론의 문제 제기가 있지만, 대체로 별 문제가 없다는 투다. 이미 대다수 언론이 현 정권의 채찍과 당근에 의해 장악된 마당에 그런 비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망이다. 다만 한은의 정치적 독립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거나 이를 의도적으로 깔아뭉개는 사람이 한은을 이끌 때 생겨날 경제적 부작용과 혼란이 미리 염려될 뿐이다. 그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것은 이 땅의 서민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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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인 2010. 3. 17. 0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