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이나 재미교포도 미국산 쇠고기 다 먹는다”.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최근 조중동의 사설과 칼럼을 읽다 보니 마치 서로 짜맞춘 듯 논리가 비슷했다. 그 가운데 판박이처럼 거의 똑같이 되풀이되는 내용이 있다. 수십만, 수백만명의 미국 유학생이나 재미교포도 탈 없이 쇠고기 잘 먹고 있는데, 왜 야단법석을 떠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일보 박정훈 경제부장이 쓴 ‘경제초점’은 아예 제목부터 ‘11만 한국 유학생이 먹는 미국 쇠고기, 황당한 논리로 수입 반대’다.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왜 그럴까? 내 경험에 비춰 얘기해보자. 나는 2005년 8월부터 2007년 7월말까지 정확히 2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동부의 한 대학에서 공공정책 석사 과정을 했다. 그 당시 쇠고기 많이 먹었다. 원산지를 따지고 먹은 적은 없지만 상당수가 미국산이었을 것이다. 소고기 햄버거도 먹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국 식당에서 갈비도 뜯었다. 가끔은 “미국인들이 소뼈를 안 먹어서 그런지 여기는 소뼈가 너무 싸다”고 즐거워하며 아내가 해준 곰탕과 사골국까지 먹어댔다. 그때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한국에서 소고기 사먹 듯이 먹었다는 말이다.


대학원 동기 중에 일본 농무성에서 온 공무원이 한 명 있었다. 공공정책 대학원이다 보니 세계 각국의 공무원들이 꽤 있었다. 어느 날 그와 얘기를 나누다 그 친구가 미국산 소고기를 안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농무성에서 쇠고기 수입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었는데, 미국 소고기의 관리 및 유통 실태 등을 알게 된 뒤로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는 게 불안하다고 했다. “너무 위험성을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냐”고 내가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미국 소고기의 관리 및 유통, 검사 실태 등을 알면 절대 100% 안전하다고 할 수 없어. 아주 작은 확률이라 해도 만약 발병하면 광우병은 치사율이 100%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미국산 쇠고기를 꼭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뒤에도 나는 쇠고기에 대한 유혹을 끊지 못했다. 느끼한 현지 음식들에 물렸을 때 가끔 생각나는 갈비의 맛은 ‘고향의 맛’ 그 자체였기에.


그러다 어제 아침 인터넷에서 PD수첩을 봤다.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서 먹었던 소고기를 도로 다 게워내고 싶었다. 더구나 당시 원기 보양해준다며 ‘위험 부위’중 하나인 뼈로 곰탕까지 끓여준 아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사실 아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대학원 동기의 말이 새삼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도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쇠고기를 그렇게 즐기지는 않았을 텐데. 아내가 아무리 정성들여 끓였더라도 최소한 설렁탕이나 곰탕은 안 먹었을 것이다.


그렇다. 조중동 주장대로 재미 교포나 유학생들 다들 미국산 쇠고기 먹는다. 그리고 자사 특파원들도 다 먹을 것이다. 단 자기들이 어떤 상태의 고기를 먹는지 잘 모르면서 말이다. 내 생각에는 조중동의 특파원들도 PD수첩을 봤다면 아마 예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먹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곰탕이나 설렁탕 먹을 때는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니 말이다.


영어에 ‘informed decis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을 뜻한다. 제대로 된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이가 알만한 상식선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라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상태에서 시민의 의사를 물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의 의사를 묻는 것은 여론조작이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됐던 상속세 폐지 또는 완화 방안에 대해 국민의 70% 가량이 찬성했다는 게 대표적 사례다. 상속재산이 5억원 미만이면 일괄공제를 통해 한 푼도 안 낸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였다. 실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조사결과 상속재산 부과 기준을 알고 있는 시민은 30%도 되지 않았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실제로 자신이 상속세 부과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이 즉석에서 입장을 바꾸는 경우도 나왔다. 짐작컨대 많은 시민들이 “어쨌든 세금 줄여준다는 데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찬성했을 것이다. 그들이 상속세의 실태에 대해 충분히 정보를 가진 상태였다면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조중동이 재미 교포나 유학생들을 갖다 붙인 것도 이런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경우다. 많은 재미교포나 유학생들이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현지에서 먹고 있다. 그들이 일본 농무성 공무원이었던 내 동기가 가진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마냥 푸근한 마음으로 갈비를 뜯고 곰탕을 먹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재미교포나 유학생들 대다수의 행태를 자신들 주장의 논거로 삼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이는 전문 의사의 소견 대신 일반 대중 10명의 의견을 물어 어떤 환자에 대한 진단을 내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조중동이 괘씸한 것은 이런 엉터리 논거를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기본적인 언론의 책무조차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시민들이 ‘informed decision'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정부와 언론의 책무요 기능이다. 중요한 정책 이슈에 대해 전문가의 견해와 일반 국민들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고, 사후에도 최대한 투명하게 국민에게 설명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 그런데 이번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 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더구나 이를 비판해야 할 조중동은 오히려 정부 입장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번 협상이 가져올 파급효과나 부작용에 대한 심층적 분석 또한 없었음은 물론이다. 민주사회에서 복잡한 이슈들에 대해 정확하고 공정하게 정보를 정리해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이 공기(公器)로서 언론의 기능이다. 생업에 종사하며 바쁜 개개인이 모든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쇠고기 협상 과정 전후에서 조중동이 보여준 역할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개인적으로는 PD수첩 내용 가운데 일부 과장된 대목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개연성은 높다 해도 인간 광우병으로 확정되지 않은 한 미국 여성의 사례를 사실상 광우병 환자로 기정사실화한 대목이다. 하지만 PD수첩이 전한 내용들은 대부분 시민들이 ‘informed decision'을 내리는 데 매우 필요한 정보들이었다. 미국 내 광우병 의심 소의 관리 및 도살 처분 과정이 매우 허술하다는 것, 광우병 소를 가려내기 위해 전수 조사가 아닌 샘플 조사를 한다는 것, 미국에서 사료로 쓰는 것도 금지된 월령 30개월 이상의 소고기도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됐다는 것, 한국인이 즐겨 먹는 ’위험 부위‘들까지 수입된다는 것, 인간광우병에 대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으로부터 100% 안전하지 않다는 것, 광우병 발병까지 보통 10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친다는 것,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자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 이명박 정부가 전임 정부의 입장을 뒤집고 전문가와 일반 여론 수렴 없이 졸속으로 협상을 체결했다는 것 등등은 모두 시민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였다.


중앙일보 사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과학계와 의학계의 주류 학자들은 에이즈나 독감처럼 인류의 대재앙이 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비현실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충격과 공포를 부추기면 곤란하다. 언필칭 ‘공영방송’이라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니 방송이 욕을 먹는다.” 같은 방송프로그램을 본 게 맞다면 PD수첩은 “광우병이 인류의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한 적은 없다. 비현실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충격과 공포를 부추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방송 내용의 핵심은 대부분 사실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마지막 두 문장은 조중동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언필칭 ‘정론지’라면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부만 감싸고도니 조중동이 욕을 먹는다. 반면 언론의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PD수첩은 국민들의 격려와 찬사를 받는다.




사족 1. 과학적 논거들을 바탕으로 토론할 내용조차 ‘반미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는 유치하고도 악랄한 조중동의 저의는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가 시대착오적인 이념세력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사족 2. 조중동의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전문성을 가진 다른 분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사족 3. ‘수입 개방하면 서민들이 싼 값에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원론을 모든 문제점에 대한 면죄부처럼 사용하는 것도 가소롭다.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지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앞서는 정부의 역할이다. 국민들이 싼 값에 쇠고기를 먹을 수만 있다면 그들의 생명과 건강은 뒷전으로 내팽개쳐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소비자 후생을 생각한다면, 사실상의 독과점 보장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안기는 건설, 자동차, 석유화학 산업 등은 왜 FTA협상 때마다 개방 안 하려고 안달인가. 국민들이 기껏해야 쇠고기에 1, 2만원 더 지불하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국산 자동차를 미국에서보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더 지불해야 하는 사정은 왜 나 몰라라 하는가. ‘무조건 국내 농업 보호는 안 된다’면서 왜 재벌 주도 산업들에 대한 정부의 과보호에는 왜 호된 질책을 보내지 않는가. 백번을 양보해 소비자 후생 증대 효과 때문에 쇠고기 수입 개방에 찬성한다 하더라도 협상 과정 전후의 절차적 문제는 짚을 필요도 없는 것인가. 조중동의 편향성과 이중성이 역겨울 뿐이다.

------------------------------------------------------------------------------

사족 추가. 글을 올린 뒤 달린 댓글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공통으로 지적해주신 내용이 있네요. 대표적으로 ‘1310’님은 미국에서는 20개월 미만의 소만 먹게 돼 있고, 유통기한까지 정확하게 표기하게 돼 있으며, 광우병 위험부위는 판매되지 않는다고 하셨고요. ‘유학생’님도 “미국에선 20개월 미만의 소고기를 유통시키는데다 대부분은 호주산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반면 또 다른 ‘유학생’이라는 분은 “미국은 자국산 쇠고기가 소비의 90%이상을 차지한다”며 “게다가 수입 쇠고기 중에서도 호주산이 1위가 아니고 전체 수입량의 1/6도 안 된다”고 하시는군요. 이 부분은 나중에 내용을 자세히 아시는 분들께서 좀더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위에서 썼다 시피 미국에 있는 동안 별 생각 없이 쇠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 없는 부분은 언급 안 한 것인데, 여러 분들의 댓글 내용이 제 글의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워줍니다.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언론개혁'란에도 떠있습니다. 더 깊이 있는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포럼에 들러주세요. 

by 선대인 2008. 5. 2. 0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