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지하 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는 죄수가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동굴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하여 머리를 좌우로도 뒤로도 돌릴 수 가 없다. 죄수의 등 뒤 위쪽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죄수는 횃불에 비추인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


죄수와 횃불 사이에는 무대 높이의 회랑이 동굴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다. 이제 이 회랑 뒤에서 누군가가 인형극 놀이를 한다고 상상하자. 돌이나 나무로 만든 동물 모형, 사람 모형을 담장 위로 들고 지나가는 것이다. 죄수는 횃불에 의해 투영되는 모형의 그림자만을 볼 뿐, 실재의 모형을 본적이 없지. 인형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대사를 읽을 경우, 죄수는 모형의 그림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인식할 거야.


이제 죄수의 몸을 묶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자. 모형을 죄수에게 보여주자. 당신이 보아온 동굴 벽의 이미지는 모형의 그림자였음을 설명해 주자. 죄수는 악을 쓸 것이다. 평생 그림자만 보아온 죄수는 그림자를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고집할 게야.”

(플라톤의 ‘국가(Politeia)’중에서)




매트릭스(Matrix).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해 전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의 제목이다. 이 영화에서 매트릭스는 기계에 의해 가상 현실을 진짜 현실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 체계를 뜻한다. 이 표현은 지난해 말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네르바’가 되풀이 언급한 뒤로 영화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폭넓게 알려졌다. 필자는 미네르바의 한국경제 분석보다 익명성이 주는 신비감과 함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라’라는 메시지가 훨씬 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믿는다.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장치는 ‘희생양 만들기’다. 검찰이 ‘미네르바 때문에 환율이 폭등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여기에 대해 피지배세력은 ‘음모론’으로 대응한다. 지배세력의 방해로 충분하고 체계적인 현실 이해가 어려운 피지배세력은 현재 자신이 겪는 고통이 ‘극소수 지배세력’의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현재의 전세계적 경제 위기를 ‘유태계 자본의 음모’로 보거나 미네르바가 ‘노란 토끼(엔화 자본)’가 한국을 싹쓸이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희생양 만들기와 음모론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를 단순화해 실체적 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벽에 투영된 인형극 놀이일 뿐이다. 동굴 벽에 투영된 그림자는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니다. 실체적 진실은 동굴 밖 찬란한 태양 아래 놓여 있다.


한국 사회경제에도 분명히 매트릭스와 같은 현실이 있다. 그것은 삼성에버랜드 사건과 관련해 이건회 회장 등이 무죄판결을 받은 현실에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명박대통령에게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 수준으로 보고하고도 국민들에게는 플러스 성장을 할 것으로 말한 사실에서, 또는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자신들에게 광고를 주는 건설업체를 위한 기사를 쏟아내는 한국 신문들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매트릭스는 워낙 복잡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세력 또한 워낙 강고하므로 일반인들이 매트릭스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끔 일반인들이 그 같은 매트릭스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가령 지난해 말 한국경제의 위기감이 극에 이르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될 때이다. 미네르바의 주장이 그토록 많은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상황과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과 매트릭스가 어떤 식으로 구성돼 당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매트릭스를 빠져나와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의 발달을 통한 집단지성의 발현은 많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매트릭스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것은 한국의 정보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이 기득권에 유리하게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생산하는 정부부터 많은 경우 정보를 통제하거나 왜곡한다. 현 정부 들어 그 같은 사례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또 정부 정책이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증권사나 정부 산하 연구소, 재벌계 연구소 등은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증권사들은 매도 의견 보고서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정보 유통 구조 또한 많이 일그러져 있다.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광고주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많은 사안에서 상당수 기득권 신문들은 자사의 기득권과 광고주, 그리고 그들 신문이 대변하는 기득권 세력을 위해 진실을 호도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자라 이명박 정부는 KBS와 YTN에 낙하산 인사를 앉히고, MBC에 대해서는 민영화 위협과 PD수첩 제작팀의 검찰 수사 의뢰 등의 방법으로 언론을 압박하고 있다. ‘공정방송 사수’를 기치로 내건 YTN 노조원들의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주요 간부들이 낙하산 인사가 임명한 사람들로 채워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를 인터뷰하러 온 KBS 기자나 PD들 가운데는 ‘과거처럼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또는 뉴스를) 만들 수 없다’고 자조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 언론들이 정부의 거짓 발표를 무비판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이 제대로 경제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다카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대본영의 발표만 전달했던 상황에 비유하며 버블 붕괴라는 ‘제2의 패전’ 뒤에 가려진 진실을 국민들이 보지 못하게 했다고 비판했다. 지금 한국 언론의 상황은 당시 일본 언론의 상황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일부 기득권 언론을 비판하는 매체들이 있지만, 충분한 깊이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런 언론들조차 ‘진보진영’ ‘개혁진영’으로 스스로를 표방하며 기득권세력을 은연중에 ‘보수세력’으로 미화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보수/진보의 낡은 이념틀에 가두고 진보를 대변하는 것으로 포지셔닝함으로써 생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언론 또한 낡은 이념의 틀로 사람들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거대한 정책실패가 겹치면서 발발한 세계 및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한 구체적 분석 없이 ‘신자유주의’ 등등 이념적 틀로 접근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따라서 그들 언론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서는 비교적 다른 목소리를 내지만 경제 문제 등의 보도는 깊이와 전문성에서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이들 신문 또한 광고주의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한국 언론 전반의 문제이지만, 이들 언론의 기자들 가운데 한국 사회경제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낼 만한 충분한 전문성을 가진 이는 많지 않다. 또한 낡은 이념의 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목소리인지도 의문이 든다.   


다행히 쌍방향 정보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의 발달은 이 같은 정보 유통과정의 왜곡을 어느 정도 중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 미디어가 만들어낸 왜곡된 컨텐츠를 대량 유포하는 통로가 되는 등 문제점도 적지 않다. 그나마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장이 돼온 인터넷 또한 검찰을 동원한 현 정부의 겁박에 밀려 무력화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검찰 수사 이후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그토록 활성화돼 있던 토론광장인 ‘아고라’를 첫 화면에서 감춘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보를 소비하는 수용자의 태도도 매우 왜곡돼 있다. 왜곡된 정보 생산과 유통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거기에 많은 이들이 길들여진 탓이다. 예를 들어, 현 정부를 비판하면 그 논리를 따지기 전에 정치적 또는 이념적 색깔부터 따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집값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면 그 논리적 근거를 보기보다 ‘집이 없으니 배 아파서 그러느냐’는 인신공격이 이어진다.  


이 같은 정보 환경에서 일반인들이 중요한 사회경제적 사안들에 대해 제대로 현실을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정확한 정보가 유통되지 않아 생기는 폐해는 매우 크다. 소비자나 투자자로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면 공급자인 기업과 그 기업의 내부자들에게 판판이 당하기 십상이다. 한국의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자에 사기와 선동질이 난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민으로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없다. 그 같은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다. 이미 여야와 좌우를 떠나 많은 국민들이 ‘속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현 정부에 큰 기대를 안 했겠지만, 국정운영 수준의 저열함과 비열함, 퇴행적인 행태에 치를 떨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올바른 정보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 잘 알기에 한국 사회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알리는 작업을 필생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필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또 필자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해관계를 멀리하고 최대한 양심적이고 독립적인 자세로 현상의 이면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쓴다. 그렇다고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세금과 예산, 교육과 보육, 일자리, 경쟁구조, 언론 문제 등 많은 사회경제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필자의 블로그에 이와 관련된 10여개의 카테고리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 글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부동산 문제가 지금 한국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과 규모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이나 현재 미국 등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부동산 버블 붕괴 사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동산 문제는 한 나라의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또한 부동산 문제는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낡은 패러다임과 기득권 위주의 게임 규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제이다. 현 정부는 사실상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했고, 이를 철저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 또한 삽질경제학에 근거한 기득권 중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정책 대응으로 일반 가계의 고통이 누적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 등 막대한 건설토목 사업에 소중한 자원들을 탕진함으로써 미래세대의 부담 또한 늘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부동산 문제는 관련된 정보가 가장 왜곡돼 있는 반면 일반인들의 관심 또한 매우 높다. 이런 점에서 한국경제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기에 매우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가 요즘 무엇보다 절박하게 느끼는 것은 ‘이제 삽질경제 패러다임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지금까지 계속 부동산과 대규모 토건사업에 기반한 경제성장을 지속해왔다. 한국의 대표적 재벌들이 모두 건설업체들을 거느리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건설업은 한국 재벌들의 모태였다. 거기에서 각종 부패와 담합, 사기와 불공정 거래가 만연했다. 각종 부패사건의 절반 이상이 건설사업을 매개로 일어났다. 재벌기업들의 비자금과 정치권 검은 돈의 젖줄이었다. 또한 민간 부문에서는 고분양가로 일반 가계들의 주름살을 늘리고, 공공 부문에서는 뇌물 거래와 음성적 로비 공세에 따라 잔뜩 부풀려진 공사 발주로 예산을 탕진하는 주범이었다. 정치인들은 개발공약을 내세우고 유권자들은 개발공약이 집값을 올려줄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개발붐에 편승한다. 또한 부동산 광고를 매개로 한국 언론의 왜곡보도가 가장 만연한 영역이기도 하다.


이처럼 부동산과 토건사업을 중심으로 한 삽질경제는 한국의 산업구조가 그동안 노동집약 → 자본집약 → 기술집약적 산업구조로 이행하는 동안 줄기차게 지속돼온 패러다임이다. 정권의 좌우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또한 일반 서민들의 부동산 재테크에서부터 최고위 경제관료들의 경제 정책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와 경제를 좌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이렇게 해서 삽질경제는 한국의 사회경제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끈질긴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 같은 삽질경제 패러다임은 이것을 극복해야 할 시점에 가장 극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바로 현대건설 사장 출신의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건설족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자본의 규모를 키우며 삶의 질을 일정하게 높이는 등 삽질경제의 긍정적 효과 또한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삽질경제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한국경제가 여전히 개발연대의 삽질경제에 묶여 있는 가운데 발생하는 폐해가 너무나 크다.

삽질경제를 폐기해야 할 시점에 부동산 버블에 편승해 더욱 기승을 부린 삽질경제는 자산양극화와 국토의 황폐화, 민간 부담 증가와 국가 자원 낭비를 낳는 주범이다. 지식정보화 창의경제시대로 도약해야 할 한국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걸림돌이다. 부패와 반칙, 사기, 불공정 거래로 상징되는 삽질경제로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콘크리트에 투자하는 삽질경제가 아니라 인적 자원에 투자하는 경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이 같은 전환을 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삽질경제학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삽질경제로 한국경제가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는 사이 수면 아래에서 한국경제는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서민중산층과 20~40대 젊은 세대의 피해 또한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줄기차게 부동산 문제를 중심으로 글을 쓰는 이유이다. 삽질경제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경제에 앞날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끝으로 미국의 저명한 독립 언론인이었던 I.F. 스톤의 글을 인용함으로써 필자가 글을 쓰는 이유를 끝맺고자 한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약간의 위안이라도 주기 위해, 내가 직접 본 그대로의 진실을 쓰기 위해, 내 자신의 무능력에 의한 한계를 빼놓고는 그 밖의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충동을 빼놓고는 그 어떤 주인도 따르지 않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진정한 언론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나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이 밖에 바랄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by 선대인 2009. 6. 3. 0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