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 고향은 대구의 위성도시격인 경산시에서도 시골인 남산면입니다. 경산포도 주산지로 유명한 동네인데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쇠락해가는 고향 마을의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고향 마을에는 이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어른들이 대부분이고요. 청장년들과 어린 아이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끔 보이는 청장년층은 대부분 도회지로 나갔다가 해고되거나 자영업 등을 하다 실패해 다시 고향마을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부모님들이 짓던 농사를 물려받거나 거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치밀한 구상과 열정으로 벤처기업농을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제 고향 친구들이나 선후배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도회지에서 변변찮은 일들을 하며 사기를 당하거나 노름에 빠져 이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체로 학력이 낮은 편이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이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혼한 뒤 아이들은 시골의 부모님께 맡기는 경우도 많은 모양입니다. 가뜩이나 연로한데다 농사일에 바쁜 시골 부모님들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썩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곡된 한국 사회경제의 구조가 만들어낸 실업과 이혼 등의 문제를 농촌 시골마을의 연로한 부모님들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골병이 들대로 든 한국경제가 시골마을까지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농촌은 점점 쇠락하고, 내부적으로 재생산이 되지 않는 상황까지 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우리 농촌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으니 더더욱 걱정입니다.
미국 유학 동안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의 포도밭과 포도주 양조장(winery) 등을 돌아보면서 참 부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네들은 포도밭에서 우리처럼 포도를 생산해 팔기보다는 양조장에서 포도주를 생산해 파는 것이 주수익원이었습니다. 또한 양조장에서 직접 생산한 포도주와 어울리는 음식들을 중심으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곳도 많았습니다. 포도밭에도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주위 환경과 어울리게 조경까지 해가면서 관광지처럼 꾸며 놓은 곳도 있었고요. 그런 포도밭을 내려다보며 향긋한 포도주를 음미하던 시간은 얼마나 여유롭고 낭만적인지요. 저희 가족들 외에도 곳곳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가는 양조장마다 늘 붐비더군요. 각 지방 정부들은 그런 양조장들을 묶어 ‘양조장 투어(winery tour)' 루트까지 만들고 교통편까지 제공하면서 관광상품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근사해보이든지 언젠가 나이가 들면 고향에서 ‘한국형 와이너리’를 한 번 운영해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왜 농업은 1차 산업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양조산업과 같은 2차 산업이나 관광상품 자원으로서 3차 산업과 연계해 발전시킬 생각을 못할까요? 왜 FTA체결한다면서 농민들에게 농업보조금을 풀어 포도나 복숭아 등 수익용 작물을 캐내게 해 사실상 우리 농업이 하루빨리 고사되기만을 바랄까요? 우리 농촌을 덴마크나 프랑스 등의 선진 농업국가로 만들 기회는 정말 없는 걸까요? 지금처럼 ‘1년 뼈빠지게 일해 번 돈을 다음해 농비로 도로 써야 하는 농업’이 아니라 정말 품위 있게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벤처농기업과 관광자원으로 농촌을 탈바꿈시킨다면 우리 젊은이들도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다 다시 폐인이 돼 낙향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시 인구만 계속 늘어 치솟는 부동산 값에 일조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농업의 선진화 방향으로는 투자하지 않고, 농촌을 발전시킨다는 핑계로 시골마을 골목까지 시꺼먼 아스팔트를 깔아 건설업체 좋은 일만 시키고 있으니 한심할 뿐입니다.(실제로 이번에 가보니 마을 골목까지 시커먼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전에 있던 멀쩡한 시멘트 포장도로를 뜯어내고, 다시 아스팔트를 까는데 들어간 돈도 돈이지만, 소담스러운 시골 마을의 분위기를 확 깨트리는 그 미적 무감각이라니요!)
제 고향마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의 한국 경제는 선진경제로 나아가기는커녕 70,80년대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에 묶여 있습니다. 막대한 정부 예산과 국민들의 돈을 엉뚱한 곳에 탕진하면서 제대로 된 선진경제로 도약할 기회들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의 거듭된 무능과 정책실패가 우리 부모님과 자식 세대를 포함해 모든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와 사회는 이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 빨리 공정한 경쟁규칙을 확립하고 사장된 자원이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활력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연구소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뜻 있는 분들과 합심협력해나갈 것입니다. 한국 경제가 더 이상 나락으로 빠지기 전에 제 궤도에 올려놓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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