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는 동안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교차했습니다. 우선, 기뻤습니다. ‘이민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인 등 많은 소수 인종에게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는 나라인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현실의 육중한 철벽이 도도한 민심의 물결에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드높은 이상이, ‘담대한 희망(Audacious hope)’이, 숭고한 기대가 언젠가는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실이 기뻤습니다. 단순히 기쁨 정도가 아니라 등골을 따라 전율이 찌르르 흐르는 듯한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는 인종과 국적의 굴레를 떠나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에서 오랜 인류의 편견과 인식의 족쇄를 깨뜨리는 쾌거라는 점에서 기뻤습니다.



한편 부러웠습니다. 미국이라는 그 거대한 나라가, 그 나라의 유권자들이 집단으로서 뿜어내는 역동성이 부러웠습니다. 제가 무슨 친미주의자라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제가 느낀 미국은 단점도 많은 나라였지만,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매우 많은 장점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 장점 가운데 첫 번째는 전문 역량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의 보스턴에서, 그것도 2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보낸 것으로 미국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만져본 코끼리 다리만으로도 미국이 결코 그냥 운이 좋아서 세계 최강대국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단 대학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수준이 한국의 대학들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탐욕에 오도된 많은 엘리트들도 있지만,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또 다른 많은 엘리트들의 도덕적, 지적 수준은 정말 우리와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이에 더해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모여 살면서 마찰과 불협화음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같은 다양성에서 싹트는 새로운 변화를 향한 역동성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세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세계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돼 있고, 그 충격을 가장 크게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사회가 가진 역량과 다양성에서 나오는 이 역동성이 결합한다면, 미국은 시간은 걸리더라도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오바마의 미 대통령 당선도 바로 그 같은 에너지가 분출하는 한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편 서글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이번에 오바마가 선거 캠페인 내내 내건 구호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The change we can believe in)’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당선 기념 연설에서 지지자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온 말도 바로 ‘Yes, we can!'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어떤가요? 서민을 위한 과감한 개혁을 시대적 사명으로 출범했던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지친 우리 국민이 선택한 지도자는 시대착오적인 퇴물이자 건설족의 수괴일 뿐입니다. 그 스스로는 오바마와 비전을 공유한다고 낮술에 취한 취객처럼 헛소리를 외쳐대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희망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임기가 빨리 끝나주기만을 간절히 학수고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취임한지 10개월 만에 대한민국은 온갖 풍상을 겪고 서민들은 엄동설한의 냉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거듭되는 엉터리 정책과 노골적인 기득권 챙기기에 한국 경제는 끝도 없이 위기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오바마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새길 때 이명박 대통령은 ‘상위 1%의, 상위 1%에 의한, 상위 1%만을 위한 불량국가’를 실현하느라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이처럼 극명히 대비되는 현실에 서글픔을 넘어 분노마저 느낍니다.



또 한편 무기력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무지와 무능, 사악함으로 점철된 정부가 물러간다고 한들 ‘믿을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정치 세력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인가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지금 한국이 당면한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할 문제 해결 역량을 제대로 갖춘 정치 세력이 있는가 말입니다. 만약 현 정권이 물러난다고 해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역량 있는 정치세력이 있는 것인가요? 아무런 자기 정체성도, 제대로 된 문제 해결 역량도 갖추지 못한 민주당이 우리의 미래입니까? 아니면 시대 인식과 비전이 개발주의 시절의 국가주의적 관념에 고착돼 있는 박근혜와 그 추종세력들에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운명을 맡길 수 있습니까? 아니면 똑같이 시대착오적인 이념과 편협한 세력다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민생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부족한 민주노동당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느 정치 세력 하나 제대로 우리의 미래를 믿고 맡길 수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감과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 무기력감 때문에 마지막으로 드는 감정은 결연한 책무감 같은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정치세력, 기득권세력들만이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는 불공평한 게임의 룰이 아닌, 탄탄한 공동체 기반 위에 건전한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우뚝 세울 정치세력이 지금 없다면 결국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오늘 오바마의 당선은 오바마 혼자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편협함에 빠져 자기들의 지지기반 챙기기에만 골몰했던 부시 행정부에 염증을 느낀 많은 미국 유권자들이 함께 일궈낸 기적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한국에서 만들어내는데 저도 제가 처한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된 심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 변화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이번 미국 대선에서 양대 정당의 최종 후보였던 오바마 당선자와 맥케인 상원의원은 각각 자당의 주류 정치 흐름에서는 벗어나 있었던 인물들입니다. 특히 오바마 당선자는 강력한 당내 경쟁자이자 전통적 민주당의 주류 이념을 대변했던 힐러리를 따돌리고 당내 경선에 이긴 뒤 본선까지 이겼습니다. 워싱턴의 양대 정당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념적 틀에 갇혀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할 때 무당파(Independent)적 성향이 강한 오바마는 유권자들에게 기존 정치권의 변화와 미국의 변화를 역설하며 오늘의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우리도 자기들만의 울타리에 갇힌 썩은 정치권의 이전투구를 벗어나 국민의 눈 높이에서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세력을 키워내야 합니다. 또한 오바마는 47세의 젊은 대통령입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지금 많은 선진국에서는 40대, 심지어 30대의 정치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경륜과 관록보다는 스피디한 변화와 창발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과 같은 60,70대의 ‘올드보이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급변하는 세상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세대는 젊은 세대입니다. 이 젊은 세대들을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젊은 정치지도자와 정치세력을 키워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에 앞서 왜 그들이 정치적 무기력과 무관심에 빠지게 됐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번 미국 대선은 몇 십년내에 볼 수 없었던 사상 최대의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무엇이 정치적 무기력증과 무관심에 젖어 있던 미국민들을 투표소로 끌어냈을까요? 그것은 오바마로 상징되는 변화요,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주무대로 그러한 희망을 스스로 만들고 참여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도 희망을 찾는다면 결코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존재로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20,30대 젊은이들은 그동안 부모 세대와 기득권의 게임의 룰에 갇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뿐 결코 역량이 없는 세대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정치세력이 그들의 미래를 열어준다면 얼마든지 세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시대적 감수성과 세계를 선도할 잠재력을 가진 세대입니다. 지금 이들 세대들이 주축이 돼 인터넷에서 함께 만들어 내는 집단지성의 힘을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힘들을 모으고 축적한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한국판 ‘오바마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기적을 만드는데 모두 함께 힘을 모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0여년전 ‘나는 꿈이 있다’고 한 말이 지금 현실이 됐듯이, 우리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고로, 4일자 뉴욕타임스에 ‘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이자 명칼럼리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이 쓴 칼럼 ‘Finishing Our Work’을 옮겨 봅니다. 프리드먼이 평소에도 좋은 칼럼을 많이 쓰지만 오늘 칼럼은 정말 명칼럼입니다. 밑줄 그은 부분은 제가 공감하거나 인상 깊게 느낀 대목들이고, 군데군데 괄호 안에 제 생각을 조금 넣었습니다. 지금 시간이 너무 늦어 제가 번역까지 해서 올리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혹 필요하다면 내일 오후에라도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아니면 여력이 되시는 분들이 릴레이 댓글로 문단별로 옮겨보는 것도 재미있는 협업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By THOMAS L. FRIEDMAN


And so it came to pass that on Nov. 4, 2008, shortly after 11 p.m. Eastern time, the American Civil War ended, as a black man — Barack Hussein Obama — won enough electoral votes to becom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 civil war that, in many ways, began at Bull Run, Virginia, on July 21, 1861, ended 147 years later via a ballot box in the very same state. For nothing more symbolically illustrated the final chapter of America’s Civil War than the fact that the Commonwealth of Virginia — the state that once exalted slavery and whose secession from the Union in 1861 gave the Confederacy both strategic weight and its commanding general — voted Democratic, thus assuring that Barack Obama would become the 44th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his moment was necessary, for despite a century of civil rights legislation, judicial interventions and social activism — despite Brown v. Board of Education, Martin Luther King’s I-have-a-dream crusade and the 1964 Civil Rights Act — the Civil War could never truly be said to have ended until America’s white majority actually elected an African-American as president.


That is what happened Tuesday night and that is why we awake this morning to a different country. The struggle for equal rights is far from over, but we start afresh now from a whole new baseline. Let every child and every citizen and every new immigrant know that from this day forward everything really is possible in America.


How did Obama pull it off? To be sure, it probably took a once-in-a-century economic crisis to get enough white people to vote for a black man. And to be sure, Obama’s better organization, calm manner, mellifluous speaking style and unthreatening message of “change” all served him well.


But there also may have been something of a “Buffett effect” that countered the supposed “Bradley effect” — white voters telling pollsters they’d vote for Obama but then voting for the white guy. The Buffett effect was just the opposite. It was white conservatives telling the guys in the men’s grill at the country club that they were voting for John McCain, but then quietly going into the booth and voting for Obama, even though they knew it would mean higher taxes.(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될지라도 오바마를 선택한 백인 보수주의자들과 자신들의 집값을 올려주고 종부세를 줄여줄 대통령을 뽑은 부동산 부자들의 선명한 대비가 떠오르네요)


Why? Some did it because they sensed how inspired and hopeful their kids were about an Obama presidency, and they not only didn’t want to dash those hopes, they secretly wanted to share them.(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자녀들의 희망을 공유하고 싶어한 부모 세대라니, 감동적입니다. 극심한 세대간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 마음이 아픕니다.) Others intuitively embraced Warren Buffett’s view that if you are rich and successful today, it is first and foremost because you were lucky enough to be born in America at this time — and never forget that. So, we need to get back to fixing our country — we need a president who can unify us for nation-building at home.


And somewhere they also knew that after the abysmal performance of the Bush team, there had to be consequences for the Republican Party. Electing McCain now would have, in some way, meant rewarding incompetence. It would have made a mockery of accountability in government and unleashed a wave of cynicism in America that would have been deeply corrosive.


Obama will always be our first black president. But can he be one of our few great presidents? He is going to have his chance because our greatest presidents are those who assumed the office at some of our darkest hours and at the bottom of some of our deepest holes.


“Taking office at a time of crisis doesn’t guarantee greatness, but it can be an occasion for it,” argued the Harvard University political philosopher Michael Sandel. “That was certainly the case with Lincoln, F.D.R. and Truman.” Part of F.D.R.’s greatness, though, “was that he gradually wove a new governing political philosophy — the New Deal — out of the rubble and political disarray of the economic depression he inherited.” Obama will need to do the same, but these things take time.


“F.D.R. did not run on the New Deal in 1932,” said Sandel. “He ran on balancing the budget. Like Obama, he did not take office with a clearly articulated governing philosophy. He arrived with a confident, activist spirit and experimented. Not until 1936 did we have a presidential campaign about the New Deal. What Obama’s equivalent will be, even he doesn’t know. It will emerge as he grapples with the economy, energy and America’s role in the world. These challenges are so great that he will only succeed if he is able to articulate a new politics of the common good.”


Bush & Co. did not believe that government could be an instrument of the common good. They neutered their cabinet secretaries and appointed hacks to big jobs. For them, pursuit of the common good was all about pursuit of individual self-interest. Voters rebelled against that. But there was also a rebellion against a traditional Democratic version of the common good — that it is simply the sum of all interest groups clamoring for their share.(부시와 그 동료들 대신 이명박과 졸개들이라는 말을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구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In this election, the American public rejected these narrow notions of the common good,” argued Sandel. “Most people now accept that unfettered markets don’t serve the public good. Markets generate abundance, but they can also breed excessive insecurity and risk. Even before the financial meltdown, we’ve seen a massive shift of risk from corporations to the individual. Obama will have to reinvent government as an instrument of the common good — to regulate markets, to protect citizens against the risks of unemployment and ill health, to invest in energy independence.”


But a new politics of the common good can’t be only about government and markets. “It must also be about a new patriotism — about what it means to be a citizen,” said Sandel. “This is the deepest chord Obama’s campaign evoked. The biggest applause line in his stump speech was the one that said every American will have a chance to go to college provided he or she performs a period of national service — in the military, in the Peace Corps or in the community. Obama’s campaign tapped a dormant civic idealism, a hunger among Americans to serve a cause greater than themselves, a yearning to be citizens again.”(오바마의 선거캠페인이 잠자고 있던 미국민들의 공민(公民)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웠다는 지적은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None of this will be easy. But my gut tells me that of all the changes that will be ushered in by an Obama presidency, breaking with our racial past may turn out to be the least of them. There is just so much work to be done. The Civil War is over. Let reconstruction begin.



이 글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의 '정치/안보문제'란에도 띄웠습니다. 좀더 깊이 있는 정보와 토론을 원하시는 분은 포럼을 방문해주세요. 이 글은 연구소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by 선대인 2008. 11. 7.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