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건에 관해 외국 언론 보도들을 인용하면 국내에서는 외국 자본의 대변인 운운하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기득권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 장하준류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일부 진보 언론조차 그렇게 주장한다. 하지만 이건 "국익 대 먹튀 자본" 얘기가 아니다. 이건 이재용의 사익 대 정당한 주주가치 평가에 대한 얘기다. 정당한 기업가치가 1000억인 회사를 어떤 한 사람의 사익을 위해 5000억원으로 깎아내리는 관행이 횡행하는 자본시장 시스템에 누가 선뜻 투자하겠는가. 그리고 국내의 어디에선가는 사전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할 재벌3세승계 문제를 아무도 제기하지 않다가 외국 투자자의 문제제기로 겨우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상한 사례에 관한 얘기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태를 통해 결정된 시대착오적인 재벌지배체제의 영속화는 서민경제 몰락의 영속화와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영속화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 이번 결과는 삼성 이씨 일가의 뜻대로 됐으나, 재벌독식구조의 지속으로 한국경제, 특히 한국의 서민경제는 나쁜 결과가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힌트를 보여주는 기사를 만났다. (개인적으로는 왜 이런 기사가 시사인에 나지 않고, 시사저널에 나야 하는지 한없이 안타깝다.)
재벌 사랑이 애국인 이상한 나라, 한국.
이 기사에 인용된 이원일 대표라는 분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수십년 뒤 이번 합병 사태를 돌아봤을 때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큰 변환점으로 남을 것". 나도 동감한다. 이번 일은 단순히 하나의 합병 케이스가 아니다. 한국이 지금 국내 경제의 활력을 짓누르는 시대착오적인 재벌지배체제의 영속화를 용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관한 판단이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데도,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떠들지 않았고 기득권 언론들은 이재용의 사익을 국익인 것처럼 포장해 보도했다. 더구나 메르스사태에 묻혀 대중들의 관심도 크게 낮았다. 8월말까지 나꼽살을 쉬고 있는 관계로 파파이스와 전국구에 자청하다시피 나가서 이 문제에 대해 떠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재벌3세승계를 용인했다. 저출산고령화 충격과 부동산 거품 및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데, 재벌3세체제를 승인한 한국경제의 앞날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또 하나. 블룸버그의 동아시아 담당 칼럼리스트 윌리엄 페섹의 칼럼을 참고해보시길. 블로그 주인장께서 아주 친절히 번역해 놓으셨다.
이 글에서는 아래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상대적으로 다른 선진 시장들에 비해 주식 가치가 저평가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를 영속시킬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종종 삼성, 현대, 그리고 다른 한국 기업들에 의해 자행되는 사기꾼스러운(dodgy) 기업 지배 방식의 대가다."
기득권 언론들, 말만 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자고 한다. 그런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은 시대착오적 재벌 지배구조와 이들의 부패행위다. 이번 사건처럼 재벌일가의 이익을 위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삼성물산의 주주가치를 낮게 평가하면 거기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누가 제대로 투자하겠는가. 실제 기업가치보다 훨씬 낮게 평가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런데 코미디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앞장서 운운하던 경제지들이 이번 합병건을 가장 강력히 옹호했다. 물론 삼성광고에 눈이 먼 충견들의 행태였을 뿐이지만.
삼성의 승리는 한국의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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